[대농시] 새벽 코트에서 키운 3점슛, 고려대 정재엽 "언젠가 MVP 되고 싶다"

아마추어 / 이연지 기자 / 2026-05-30 11: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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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프볼=이연지 인터넷기자] 수능 점수 대신 오직 농구 실력으로 대학 문을 두드린 신입생들의 능력을 평가하는 시간.

이른바 '대학농구능력시험(대농시)'이다. 아직은 미완성이지만, 앞으로 무궁무진한 정답을 채워 나갈 이들의 성장 기록을 들여다본다. 그 두 번째 성적표의 주인공은 '고려대 정재엽(194cm, F)'이다.

 

▲ 망고스틴을 머리에 올린 유년 시절의 정재엽

 

 

#소년로그
정재엽의 농구 인생은 우연한 기회에서 시작됐다. 원래는 축구공을 차던 소년이었으나 이내 흥미를 잃었다. 정재엽의 운명을 바꾼 건 독보적인 피지컬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이미 175cm, 6학년 때 183cm까지 자란 키는 농구를 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자산이었다.

가볍게 찾아간 방과 후 수업에서 농구의 매력에 눈을 뜬 그는, 이후 떠난 호주 유학길에서도 코트의 잔상을 지우지 못했다. 결국 농구를 향한 강렬한 이끌림에 한국으로 돌아왔고, 벌말초에서 본격적인 엘리트 '농구 선수'의 길에 발을 내디뎠다.

그의 기억 속에 가장 생생하게 남아 있는 순간은 초등학교 시절 출전했던 소년체전이다. 평가전에서 성남초를 만나 모두가 벌말초의 패배를 예상했던 날, 정재엽은 팀원들에게 "한번 뭉쳐서 해보자. 모든 것을 쏟아붓고 나오자"라고 말했다. 서로의 손을 맞잡은 선수들의 간절함은 코트 위에서 하나가 됐고, 그날 경기는 마치 그들의 의지에 응답하듯 모든 것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
 

진짜 드라마는 본선 무대에서 펼쳐졌다. 벌말초는 강팀들을 차례로 꺾으며 4강까지 진격했다. 하이라이트는 부산 명진초와 맞붙은 4강전이었다.
 

"4쿼터 종료 30초를 남기고 저희가 35-36으로 1점 뒤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경기 종료 10초를 남기고 루즈볼이 거짓말처럼 제 앞에 떨어진 거예요. 바로 골밑슛을 성공시킨 뒤 펄쩍 뛰며 백코트했던 기억이 나요. 그 순간의 찌릿함은 아직도 믿을 수가 없어요. 비록 결승에서는 4쿼터 버저비터를 맞고 졌지만, 제 농구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에요."

 

▲ 골밑슛을 시도하는 벌말초 정재엽

 

어린 정재엽의 심장에 새겨진 짜릿한 승리의 기억은 농구공을 계속 붙잡게 만든 강력한 원동력이 됐다. 이후 호계중을 거쳐 안양고로 진학한 그는 1학년 때부터 U16 국가대표팀에 발탁되고, 언더아머 캠프에 초청받아 미국을 다녀오는 등 탄탄대로를 걷는 듯했다. 그러나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유망주들이 모인 국가대표팀의 생태계는 생각보다 훨씬 냉혹했다. 줄곧 주전 자리를 지켜온 정재엽에게도 태극마크의 무게는 상상 이상으로 무거웠다.

"대표팀 뽑혔을 때는 진짜 세상 다 가진 기분이었어요. 그런데 잘하는 선수들이 모인 팀이다 보니 조금만 실수해도 실시간으로 분위기가 바뀌더라고요. 그 안에서의 경쟁이 큰 압박감으로 다가와서 힘들었어요. 많이 부족하다는 걸 느끼기도 했고요."

정재엽에게 대표팀에서의 시간은 인생의 중요한 터닝 포인트였다. 그 결정적인 순간은 한 대학 팀과의 연습경기에서 찾아왔다. 하필 그날 관중석에는 대한민국 농구협회 회장과 부회장을 비롯한 관계자들이 대거 자리하고 있었다. 수많은 시선이 자신을 향하는 가운데, 오랫동안 마음속에 눌러두었던 부담감은 결국 코트 위에서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잘하고 싶어서 몸에 힘을 잔뜩 주고 했어요.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하게 기억날 정도로 많이 못 했어요. 사실은 그게 진짜 제 실력이었던 거죠. '난 이제 끝났구나, 국가대표 와서 이렇게 말아버렸으니 내 농구 인생은 끝났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경기가 끝나고 회장님이 밥을 사주셨는데 먹다가 너무 서러워서 아무도 모르게 혼자 화장실 안에 들어가서 엄청 울었어요. 한참을 울고 나서야 아무렇지 않은 척 세수를 하고 나왔죠."

남몰래 삼켜야 했던 마음고생은 그를 한 단계 성장시키는 성장통이 됐다. 그날의 기억을 디딤돌 삼은 정재엽은 더욱 단단한 선수로 성장해 나갔다.

 


#대학농구능력시험
정재엽의 등급표는 고등학교 3학년 시절 결단한 포지션 전향에서부터 다시 쓰이기 시작했다. 큰 키 덕분에 중학교 때까지는 센터를 봤지만, 성인 무대를 바라봤을 때 포워드로의 변경이 필수라는 판단이 섰다. 그는 안양고 이상영 코치에게 먼저 다가가 자신의 뜻을 전했다.

"처음에는 시행착오가 많았어요. 골밑에만 있다가 외곽에 나와서 앞선 수비를 하려다 보니, 아예 길을 몰랐거든요. 외곽에서 언제 슛을 쏴야 하는지, 언제 볼을 잡아줘야 하는지 타이밍도 전혀 몰라서 많이 힘들었죠."

"사실 공격보다 수비가 훨씬 힘들었어요. 느린 빅맨만 막다가 빠르고 날렵한 선수 수비를 하려니 헤맬 수밖에 없었죠. 이상영 코치님께 외곽 플레이를 배우면서 슛 타이밍이나 볼 없는 움직임을 많이 보완했어요. 덕분에 지금은 5번(센터)보다 3번(스몰포워드), 4번(파워포워드)이 제 플레이 스타일에 더 잘 맞는다고 느껴요. 이제 '기본은 한다'고 말할 수 있어요."

낯선 포지션에 길을 잃었던 그를 붙잡아 준 것은 독기 어린 노력이었다. 정재엽은 포워드의 기본기를 몸에 새기기 위해 누구보다 이른 새벽 코트로 향했다. 신발 바닥이 코트와 부딪치며 만들어낸 날카로운 마찰음은 그가 흘린 땀방울의 또 다른 증거였다. 그 소리가 거칠어질수록 그의 농구는 더욱 단단해졌고, 어느새 새로운 포지션에도 자연스럽게 녹아들고 있었다.

"코치님과 무빙 슛, 원드리블 점퍼, 미드레인지 게임 연습을 했어요. 무조건 새벽에 나가서 슛 200개를 던지는 걸로 하루를 시작했죠. 학교 수업이 끝나고 야간에는 저희가 저녁 9시 전에는 체육관에서 나와야 해서 늘 시간이 부족했어요. 그럴 땐 루틴을 바꿔서 지정된 위치마다 연속으로 5개씩 림에 꽂아 넣어야만 훈련을 끝내는 식으로 짧고 굵게 집중했어요."

훈련량은 숨겨진 재능을 깨우는 기폭제가 됐다. 골밑을 벗어나 외곽으로 영역을 넓힌 그의 손끝은 매서운 성공률을 자랑했다. 그 노력의 결과물은 코트 위에서 숫자가 먼저 증명했다. 2025 제62회 춘계전국남녀중고농구 연맹전 해남대회에서 5경기 연속 더블더블을 달성한 것은 물론, '20-20'까지 작성해 냈다.

이어진 연맹회장기에서도 30점 이상 기록한 경기를 두 차례나 만들어냈다. 이 같은 활약 속에 팀은 공동 3위에 올랐고, 정재엽은 대회 득점상과 리바운드상, 미기상을 동시에 거머쥐는 결실을 맺었다.

"슛 하나만큼은 진짜 자신 있어요. 외곽으로 나와 본격적으로 3점슛을 쏘기 시작하니까 시도 횟수 대비 성공률이 정말 좋더라고요. 다른 건 몰라도 슛은 타고난 재능이 있는 것 같아요." 자신의 등급표 중 '외곽슛' 영역에 주저 없이 1등급을 매긴 이유다.

반면, 수비 영역에는 냉정하게 '5등급'을 매겼다. 포지션을 바꾼 지 얼마 되지 않은 만큼, 채워야 할 숙제가 가장 많이 남은 탓이다. "수비는 밖으로 나온 지 이제 겨우 1년 차라 경험이 부족해요. 제 발이 느려서 따라가는 게 힘들기도 하고요. 항상 골밑에서 스크린을 걸어주던 입장이었다가, 이제는 밖에서 스크린을 빠져나가거나 픽앤롤 상황에 대처해야 하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 골밑을 지켰던 블루워커로서의 경험은 이점이 됐다. 남들보다 넓은 시야로 코트 전체를 읽는 눈이 생긴 것이다. "센터를 오래 본 경험이 수비할 때 큰 도움이 돼요. 상대 빅맨들이 골밑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움직임을 가져갈지 길목이 미리 보이거든요. 예측 수비가 가능한 거죠. 물론 아직은 머리가 읽는 속도를 몸이 완벽하게 따라가지 못해서 열심히 좁혀가는 중이에요(웃음)."



#대학로그
정재엽은 자신의 등급표를 손에 쥐고 첫 성인 무대에 들어섰다. 아직 빈칸은 많다. 공격과 수비, 그리고 체력까지 모두 새로 써 내려가야 한다. 대학농구는 고등학교 때 쌓은 무기를 그대로 꺼내는 무대이면서 동시에 그 무기가 통하는지 시험받는 무대다.

그 치열한 시험대 위에서, 그는 마침내 자신이 오랜 시간 간절히 바라왔던 붉은 유니폼을 입었다. 정재엽의 가슴속에는 오래전부터 '고려대학교'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중학교 때부터 고려대였어요. 문정현 선수를 닮고 싶었거든요. 감독님이 지도하시는 포스도 매력적으로 다가와서 배워보고 싶었죠."

그토록 원하던 무대에 입성한 새내기인 만큼, 코트 밖의 소박한 캠퍼스 로망도 현실이 됐다. "대학 오면 과잠을 입고 싶었어요. 입고 밖에 나가면 시선들이 느껴지더라고요. 기분 좋았어요(웃음)."

그러나 낭만적인 캠퍼스의 공기도 잠시, 대학 리그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는 마음만 먹으면 20점, 30점은 그냥 넣을 수 있었는데 대학은 하나 넣기도 힘들더라고요. 수비도 엄청 디테일하고 형들이 힘도 세고 빨라요. 부딪혀보니 제 부족한 점을 더 알게 돼서 조금씩 적응해 나가는 단계에요."

스스로 '슛 하나 넣기도 어렵다'라고 했지만, 지난 3월 26일 열린 건국대와의 대학리그 데뷔전에서 정재엽은 3점슛 2개를 100%의 확률로 꽂아 넣어 8점 3리바운드 1블록슛을 기록하며 강렬한 눈도장을 찍었다.

"데뷔전은 몸 푸는데 느낌이 오더라고요. 슈팅 드릴을 하는데 쏘는 족족 다 들어가는 거예요. 전반을 벤치에 있었거든요. 그래서 한번 뛰게 해주시면 좋겠다고 바랐는데 3쿼터에 감독님이 넣어주셨어요. 처음에 엄청 떨렸는데 첫 슛이 들어가고 나서 긴장이 완전 풀려서 그때부터 재미있게 했어요."


데뷔전의 전율을 뒤로한 채, 정재엽은 코트 위에서 마주한 선배들을 보며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있다. 이동근과 유민수를 이을 재목이라는 평가 속에서, 함께 땀 흘리는 그들은 정재엽에게 교과서가 되고 있다.

"아직 형들 발끝도 못 따라가요. 수비부터 하나씩 배운다는 자세로 임하고 있어요. 특히 (이)동근이 형은 코트 밖에서는 성격도 털털하고 좋은데 경기만 들어가면 다른 사람이 돼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눈빛과 모습을 보여줘서 늘 새롭고 놀라워요. 저는 아직 코트 안에서 너무 착하게만 하려는 경향이 있어요. 형들이 경기에 임하는 자세나 태도를 많이 배우고 있어요."

이제 막 코트 위에서의 생존법을 익혀가던 찰나, 뜻하지 않은 부상도 찾아왔다. "연세대(4월 27일)랑 경기하기 일주일 전에 골반 쪽으로 넘어졌어요. 처음에 타박상인 줄 알았는데 점점 통증이 심해져서 경기 끝난 다음 날 검사를 받았어요. 근육이 12cm가 찢어졌다고 해서 한 달 정도 재활하고 있어요."

달콤한 캠퍼스 낭만과 성장을 동시에 겪으며 첫 시즌을 보내고 있는 정재엽. 대학 무대에서 그가 이루고 싶은 최종 목적을 묻자, 돌아온 답변은 명료했다. "목표는 MVP예요!"

정재엽의 등급표에는 아직 빈칸이 많다. 그러나 그 여백은 부족함이 아닌 가능성의 공간이다. 아직은 거칠고 서툴 수 있다. 하지만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코트 위에서 부딪히며 성장해 나갈 준비는 이미 끝났다. 정재엽이라는 이름이 완성되어 가는 이야기는 이제 첫 장을 넘겼을 뿐이다.

#사진_정재엽 제공, 이연지 인터넷기자, 점프볼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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