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슬램게임] 농구 위해 역도까지 배웠다…'대체불가 조각' 꿈꾸는 동국대 슈터 김상윤의 직진(022)
- 아마추어 / 이연지 기자 / 2026-10-20 11:00:09

[점프볼=이연지 인터넷기자] 지금껏 농구 하나를 바라보며 달려온 시간은 이제 프로라는 다음 무대를 앞두고 있다. '26슬램게임'은 KBL 드래프트를 향해 저마다의 시간과 가능성을 증명해야 하는 선수들의 이야기를 담는다. 이번 주인공은 동국대 주장 김상윤(188cm, G/F)이다.

#001_Scan: 동국대 김상윤
유치원 시절부터 YMCA 아기 스포츠단을 나오고, 초등학교 2학년부터 6학년 때까지 줄곧 체육부장을 도맡던 소년. 김상윤은 학교마다 한 명씩 있다는 '전교에서 운동 제일 잘하는 남자아이'였다.
원래 그의 꿈은 축구 선수였다. 테스트까지 치르며 본격적으로 운동을 시작하려던 찰나, 운명의 전환점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우연히 다니던 초등학교에 새로 농구부가 창단된 것이다. 그러면서 만능 스포츠맨이었던 그에게 '부원 모집'이라는 특명이 떨어졌다. 선생의 부탁으로 친구들을 모아 농구부를 꾸리게 된 그는 어느새 축구를 잊을 만큼 농구의 매력에 푹 빠져들었다. 결국 농구화로 갈아 신고 전국대회까지 출전했다.
우연한 시작이었지만 재능은 일찌감치 눈에 띄었다. 초등학교 6학년 무렵, 부산중앙고에서 열린 스킬 트레이닝 캠프에 참가했을 때였다. 몸을 풀며 가볍게 던진 농구공이 3점슛 라인보다 훌쩍 떨어진 곳에서도 깔끔하게 림을 갈랐다. 이 범상치 않은 슈팅 감각은 현장에 있던 금명중 김일모 코치와 중앙고 박영민 코치의 레이더망에 단번에 포착됐다.
두 코치는 김상윤에게 본격적으로 농구를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하지만 공부도 곧잘 했던 터라 부모님의 반대가 완강했다. 6개월의 끈질긴 설득 끝에 허락을 받아냈고, 중학교 1학년 때 전학을 가 2학년부터 본격적인 엘리트 선수의 길을 걸었다.
"부모님께서는 '공부하는 게 낫지 않겠냐. 농구 진짜 힘들다. 하려면 진짜 독하게 해야 한다'라며 계속 반대하셨어요. 하지만 너무 농구가 하고 싶어서 일부러 시험도 망쳐보면서 설득했죠. 끝내 '한번 해봐라' 하셔서 시작하게 됐어요."
농구를 시작하자 키도 기다렸다는 듯 폭발적으로 자랐다. 초등학교 5학년에서 6학년으로 넘어가는 1년 사이에 무려 14cm가 컸고, 중학교에 올라가며 6cm가 더 늘었다. 키에 타고난 감각까지 갖춰지자 금명중 코치진은 김상윤을 주저 없이 '슈터'로 낙점했다.

금명중에서는 매일이 기본기였다. 수비 스텝을 1시간씩 밟고, 기초 체력을 중요시해 코트를 끊임없이 질주했다. 슈터인 김상윤은 맨바닥에 누웠다가 일어나는 즉시 림을 조준하는 훈련도 무한 반복했다. 기술적인 것보다 기본적인 밑바탕이 되는 것을 배웠다.
"중학교 때는 마냥 좋았어요. 아무리 힘들어도 제가 워낙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스타일이기도 해서 '시키시는 거 하다 보면 좋아지겠지'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선생님이나 친구들이 너무 좋아서 모든 게 재밌었어요."
그 시절 김상윤의 가슴속에 가장 강렬한 잔상을 남긴 기억은 한여름 부산 광안리 해변에서 쓰였다. 기온이 32도까지 치솟은 날, 그는 등에 작은 낙하산을 멘 채 뜨거운 모래사장을 달렸다. 바닷바람은 낙하산을 뒤로 잡아당겼고, 발은 모래 속으로 푹푹 빠졌다. 앞으로 달려나가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상황에서 때로는 네 발로 기어가야 했다.
"바닷가 바람이 많이 불어서 작은 낙하산인데도 맞바람을 받으면 엄청 힘들었어요. 어떤 형은 토하기도 했어요. 모랫바닥에서 뛰는 거라 발이 푹푹 들어가서 저도 모르게 중심을 잡으려고 다리 근력을 많이 쓴 것 같아요. 그렇게 저항을 이겨내면서 앞으로 달려나가다 보니까 치고 나가는 힘이 더 생겼어요. 그 훈련 덕에 농구할 때 뛰는 게 조금 편하게 느껴졌죠. 어릴 때는 성장이 더 빠르다 보니까 변화도 금방금방 느껴졌어요."
훈련이 끝나자 '입수!'라는 외침이 울려 퍼졌다. 선수들은 일제히 바다에 몸을 던졌다. 훈련의 고단함마저 잊게 한 그 장면은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김상윤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아직도 눈앞에 그려질 정도로 너무 좋았어요. 솔직히 그런 경험하기가 쉽지 않잖아요. 부산이니까 가능했죠. 그리고 바로 사우나도 갔어요. 힘들었지만 되게 행복했죠."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 김상윤은 시계를 잠시 멈췄다. 몸이 성치 않았기에 코치진은 1년의 휴식과 재활을 권했다. 차기 시즌에 입학할 신입생들과 합을 맞춰 팀의 전력을 꾸려보자는 판단도 더해졌다. 그렇게 1학년쯤 '1년 유급'이 결정됐다.
이 1년의 공백기 동안, 김상윤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특별한 경험을 했다. 오히려 전화위복의 기회를 만든 것이다.
시작은 선배의 뜻밖의 추천이었다. 중앙고와 동국대를 거쳐 프로 무대까지 밟은 뒤 체육 교사로 재직하던 이충암 선생이 김상윤에게 역도를 배워볼 것을 제안했다. 이 선생이 근무하던 학교에는 전국에서 날고 기는 선수들이 모여 있는 역도부가 있었다. 김상윤은 그곳 '역도장'에 도착해 3달가량 역도를 배웠다. 언뜻 엉뚱해 보이는 3개월의 역도는 김상윤이 순발력을 온몸으로 체득한 시간이 됐다.
"제가 역도 했다고 하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다들 웃어요. 근데 진짜로 3달 동안 배웠어요. 지금도 웨이트 트레이닝 하면 무게를 엄청 많이 치거든요. 그때 힘쓰는 법을 배워서 파워 클린이나 배운 부분들을 계속하고 있어요."
탄탄하게 몸을 만들고 '보여줘야겠다'라며 돌아왔지만, 코로나19라는 초유의 단절이 찾아왔다. 모처럼 나선 주말리그에서 2경기 평균 22.5점 6.5리바운드라는 맹활약을 펼치고도 무대는 닫혀버렸다. 슛감도 좋았고, 선배들의 출전 시간이 많지 않아 김상윤에게 기회가 찾아왔지만, 그 기세를 이어갈 실전 무대는 부족했다.
그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몸을 단련할 방법을 스스로 찾아 나섰다. 어릴 때부터 같은 아파트에 살았던 오랜 친구인 강지훈(한양대)과 함께 끝없이 펼쳐진 황령산 천계단을 뛰어올랐고, 산속 헬스장인 이른바 '산스장'에서 구슬땀을 흘렸다. 집과 주차장 역시 훈련장이 됐다.
"역도를 배우고 오면서 코어 근육이 너무 약하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어요. 경사진 곳에서 윗몸일으키기를 했는데 5kg 원판을 안고 못 올라가는 거예요. 옆에서 다들 20kg 바벨 들고 하는데 저는 못하고 있으니까 진짜 심각하구나 느끼게 된 거죠. 그래서 집에서 밴드를 방문에 걸어두고 당기면서 코어 운동을 진짜 열심히 했어요. 어머니가 시끄럽다고 그만하라고 하실 정도로 코어 강화를 위해 노력했어요. 무게가 나갈 만한 물건이나 골프백을 메고 스쿼트도 하고 턱걸이도 했어요. 진짜 제로베이스였다면 그때 100 중에 50까지는 만들어놓은 거죠."
꾸준함을 뒷받침한 장치도 있었다. 선수들은 단체 채팅방에 매일 운동 인증 사진이나 영상을 올렸다. 타임랩스로 운동 장면을 촬영하거나 운동 전후를 확인할 수 있도록 시계와 함께 사진을 찍는 등 인증 방식은 매번 달랐다. 자칫 느슨해질 수 있는 일상에 긴장감을 불어넣은 것이다. 김상윤은 이를 두고 "굉장한 전략가셨다"고 돌아봤다.

2학년 시절 부임한 박훈근 코치는 팀 체질을 완전히 바꿨다. 에이스 한 명에게 의존하던 기존의 스타일을 탈피하고, 모든 선수가 공을 만지며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팀 농구'를 심는 데 초점을 맞췄다.
"코치님이 정말 충격을 받으셨어요. '왜 너희는 스크린을 거는 법도 모르냐.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다'라고 하시면서 저희를 다 뜯어고치고 시스템을 바꾸셨죠. 팀 농구를 처음 배웠더니 너무 어려웠어요. 자려고 누우면 계속 생각나서 매일 저녁마다 머리가 너무 아팠어요. 제가 슈퍼 N(직관형)이거든요."
하지만 남모를 성장통 끝에 찾아온 것은 농구의 새로운 재미였다. 손발이 맞아떨어지기 시작하자 경기가 기다려질 만큼 자신감이 붙었다. 김상윤은 "우리 좀 잘하네. 이렇게 바뀌었다는 걸 보여줘야겠다"라는 기대감으로 무장했다.
그 열망은 코트 위 투지로 이어졌다. "항상 부산은 악착같은 게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셨어요. 한 경기에 다이빙을 두 번씩은 꼭 했어요. 이기고 싶은 마음을 온몸으로 보여줬죠. 그렇게 악착같이 뛴 덕분에 당시 강팀이었던 홍대부고도 이겼어요."
팀의 색깔을 바꾸는 동안 개인의 무기도 한층 날카로워졌다. 금명중 시절부터 3점슛 감각이 남달랐던 김상윤은 고교 무대에서도 스텝만 맞으면 어디서든 외곽포를 가동하는 수준급 슈터였다. 그런 그에게 슈팅을 한 단계 더 정교하게 다듬는 결정적 계기가 찾아왔다. 2학년 무렵 청소년 국가대표와 고려대, 프로 무대를 두루 거친 슈터 출신 이영현 코치(현 청주여고)가 중앙고 A코치로 합류한 것이다. 김상윤을 유심히 지켜본 이 코치는 짧은 한마디를 던졌다.
"너 슈터 아니야."
이 코치가 남긴 첫마디는 나름 슈터로서 슛이 좋다고 자부했던 김상윤의 자존심에 살짝 스크래치를 냈다. 하지만 이는 곧 감탄으로 바뀌었다.
"그전까지는 빅맨 출신 선생님들한테만 배워온 터라 디테일하게 배우지는 못했어요. 그런데 엄지발가락에 힘을 줘야 하는 타이밍이나 스텝, 정말 발가락 하나하나를 다 잡아주셨어요. 가르쳐주시는 대로 하니 슛이 좋아지는 게 확 느껴지더라고요. 코치님을 존경하게 되면서, 나중엔 시키지 않으셔도 스스로 훈련을 찾아서 할 정도였죠. 그때 엄청나게 성장할 수 있었어요."

변화는 슈팅 자세에만 머물지 않았다. 이전까지 김상윤은 코너에서 패스를 받아 던지는 슛에 익숙했다. 이 코치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무빙슛과 한 박자 빠른 타이밍을 장착하며 스스로 기회를 창출하게 했다.
경기 초반 슛이 안 들어가면 골대를 바라보지 않는 경향 역시 과감하게 덜어냈다. '슈터라면 실패하더라도 다음 기회를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 태도를 익히면서 김상윤은 슈터로서 한층 단단해졌다.
"제 안에 박혀 있던 슛에 대한 틀을 깨주셨어요."
실패해도 다음 기회를 주저하지 않게 되자, 2학년 때 슛 시도 자체가 이전보다 두 배가량 늘었다. 무작정 던지는 '막 슛'이 아니라, 영양가 있고 자신감 넘치는 슛이었다.
이 코치의 '슈터 개조'는 공격에서 끝나지 않았다. 반쪽짜리 선수가 되지 않으려면 수비와 궂은일은 필수였다. '슛이 있으니 수비만 장착하면 확실한 경쟁력이 생길 것'이라는 이 코치의 지도 아래, 김상윤은 혼나가며 수비를 다져 나갔다.
"특히 '슈터는 네 손에서 공격이 끝나니까, 동료가 쏠 때는 무조건 리바운드에 들어가야 미움받지 않고 믿음을 얻는다'라고 하셨어요. 생각해 보니 정말 그렇더라고요. 만약에 제가 같은 팀인데 매일 슛만 쏘고 궂은일은 안 하면 미울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수비나 리바운드 등 외적인 부분에서도 팀에 보탬이 되자는 마인드를 갖게 됐어요. 지금도 리바운드를 못 잡아도 무조건 뛰어들어가요."
공수 양면에서 껍질을 깬 김상윤은 3학년 추계연맹전에서 기량이 만개했다. 평균 21.4점 5리바운드를 기록했고, 안양고와의 준결승에서는 3점슛 7개 포함 31점을 쓸어 담았다. 훈련과 깨달음이 마침내 고교 무대에 자신의 이름을 확실하게 새겨 넣은 결실로 이어진 것이다.

#002_Life in University
3점슛 라인 두 발짝 뒤에서도 망설임 없이 슛을 던지고, 벤치에선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는 동국대의 분위기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렇게 김상윤은 주황색 유니폼을 입게 됐다.
"동국대 선배님들 경기를 보는데 1대1 찬스에서 바로 3점슛을 쏘더라고요. 저랑 잘 맞을 것 같았어요. 그리고 연습경기를 하게 됐는데 팀 분위기도 너무 좋아 보여서 '진짜 이 학교에 오고 싶다'라고 마음을 굳게 먹었어요."
원하던 동국대에 입학해 마주한 이호근 감독은 평소 인자하면서도 코트 위에서는 엄격하게 선수들을 이끄는 사령탑이었다. 특히 신입생 김상윤의 뇌리에 깊게 박힌 순간이 있다. 완벽한 1대1 찬스에서 슛을 주저하자 불호령이 떨어진 것이다.
"이전까진 넘어오자마자 바로 쏘는 퀵샷을 쐈다가 실수하면 엄청 혼났거든요. 그래서 1대1 찬스에서 주춤했더니 감독님께서 '왜 안 쏘냐'며 뭐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정말 물 만난 고기처럼 슛을 쐈던 기억이 나요. 너무 좋았어요."
그해 3월 연세대와의 경기에서 자유투로 데뷔 득점을 올리며 첫발을 뗐지만, 코트 위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원래 큰 경기일수록 즐기는 편인데, 그날은 너무 긴장해서 손이 떨릴 정도였어요. 제가 뭘 했는지 기억조차 안 나서 나중에 중계 영상을 돌려보며 확인했죠. 상대가 연세대이기도 했고, 중계진과 수많은 관중 앞에서의 첫 출전이라 여유가 하나도 없었어요. 농구적인 운영이나 몸싸움 모두 시야가 엄청 좁았던 것 같아요."
실전을 통해 부족함을 뼈저리게 느낀 김상윤은 발돋움하기 위한 담금질을 거듭했다. 이호근 감독은 선수들의 슛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연습이 끝나면 종종 랜덤으로 선수를 지목해 '슛 1000개 성공'이라는 과제를 내렸다. 둘이서 번갈아 쏘면 꼬박 6시간이나 걸리는 강행군이었다. 하지만 체육관을 끊임없이 오가며 지켜보는 감독의 열정 앞에 요령을 피울 틈조차 없었다.
"보여주고 싶어서 새벽 1시까지 1000개씩 쐈어요. 1학년 때 (유)정원이랑 룸메이트였는데, 슛 쏘고 들어와서 신입생이니까 빨래까지 다 돌리고 나면 새벽 2시였거든요. 그때 냉장고에 있던 케이크를 둘이서 울면서 퍼먹었어요. '우리 이렇게 힘들어서 앞으로 어떡하나'라며 거의 눈물 젖은 케이크를 먹은 거죠(웃음). 그래도 그렇게 1000개씩 쏘니까 저희끼리 '신의 경지에 다다랐다'고 그랬어요. 몸은 엄청 무겁고 컨디션은 안 좋은데 슛은 던지는 대로 잘 들어갔거든요."

이토록 치열하게 땀을 쏟았지만, 곧장 빛을 본 것은 아니었다. 1학년부터 3학년까지 그의 대학 생활은 기약 없는 기다림, 그리고 부상과의 싸움이었다. 1학년 때는 왼쪽 무릎, 2·3학년 때는 허리 부상이 발목을 잡았다. 쟁쟁한 선배들에게 밀려 출전 기회를 잡기 어려웠고, 몸 상태를 끌어올릴 만하면 야속하게도 다시 부상이 찾아왔다.
세 시즌 동안 코트를 밟은 건 총 18경기, 평균 출전 시간은 5분 남짓. 3년 내내 올린 득점은 단 14점에 불과했다. 슈터로서 무언가를 보여주기엔 턱없이 짧은 시간이었다. 어쩌다 코트에 나설 때면 심리적 압박감이 먼저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1, 2학년 때는 코트에 서는 것 자체만으로 엄청 긴장했어요. 처음에는 환경적인 측면에서 긴장했다면, 나중엔 '감독님께 뭔가를 보여줘야 하는데 실수하면 어떡하지'라는 부담감에 떨렸어요. 그래도 3학년부터는 고학년이니까 완화가 됐죠."
출전에 대한 목마름 속에서도 김상윤은 단 한 번도 농구를 그만두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도약을 준비하던 3학년 때 찾아온 부상은 언제나 긍정적이던 그의 멘탈마저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3학년 때 다치고서는 심적으로 완전히 무너져서 '내가 이 몸으로 계속 운동을 할 수 있을까, 그만둬야 하나' 싶었어요. 그때 감독님과 코치님을 찾아뵀는데 '할 수 있다, 조금만 더 열심히 해보자'며 꽉 잡아주셨어요. 그 말씀에 힘을 얻어 독하게 재활에 매달린 덕분에 복귀도 많이 앞당겼어요. 몸 상태도 좋아졌고요. 복귀하고는 불안한 생각은 다 지워버리고 농구만 열심히 해보자고 마음먹게 됐죠."
안개 속에서 헤맬 때 곁을 지키며 힘을 보탠 동료도 있었다. 고교 시절부터 함께한 우성희는 김상윤이 대학에서 농구가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마다 "고등학교 때 영상을 보라"고 권하며 "너는 원래 그런 선수였다"고 말해줬다. 김상윤의 가능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동료였기에 건넬 수 있는 따뜻한 위로였다.
이렇듯 감독의 믿음과 동료의 응원 속에서 버텨낸 3년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경기에 나서지 못하고 벤치를 달궈야 했지만, 김상윤에게 그 시간은 묵묵히 칼을 가는 시간이었다. 하루하루 간절함을 안고 코트 밖에서 농구를 눈에 담으며 자신의 밸런스를 찾아 나갔다.
절치부심 끝에 맞이한 4학년. 그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달았던 등번호 17번을 과감히 떼고 7번을 달았다. 완전히 달라지겠다는 무언의 다짐이었다. 그리고 그 다짐은 코트 위에서 증명됐다. 개막전부터 3점슛 5개를 림에 꽂아 넣으며 16점을 새긴 그는 15경기 평균 9점 3.5리바운드 1.8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팀의 든든한 주축으로 자리 잡았다.
"4학년이 돼서 동계 때부터 주전으로 들어가면서 많은 기회를 받았어요. 보여줄 시간이 길어지니 자연스레 실력도 많이 늘더라고요. 이전에 기회를 많이 못 받아서 경기에 들어가면 여유가 없기도 했는데, 이제는 제 밸런스를 찾아가면서 뭘 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게 됐어요."
"경기 전에 혼자 스스로에게 '잘하는 거 맞아'라고 최면을 걸고 들어가요. 팀에 도움이 되고 싶어서 리그 시작하면서부터 지금까지 늘 생각하면서 경기를 해 왔던 것 같아요. 저한테는 마인드 컨트롤이 중요한 것 같아요."

그에게 4학년은 개인의 반등을 넘어 팀으로서도 의미가 남다른 시기였다. 동국대는 9년 만에 MBC배 결선 진출에 성공했다. 오랜 시간 출전에 목말랐던 김상윤에게는 더없이 간절한 무대였고, 주장으로서 팀을 이끌어 낸 성과라 기쁨은 배가 됐다.
"저한테 소중한 기회였어요. MBC배가 4학년한테 중요하기도 하잖아요. 그리고 감독님께서 MBC배 하기 전에 결선에 가면 농구화 하나씩 사주겠다고 공약을 거셨어요. 그런 부분에 있어서 감독님께서도 간절하시다는 걸 알게 됐죠. 주장으로서 감독님께 선물을 드린 느낌이었고, 그렇게 보답해드리니까 뿌듯했어요. 감독님께서도 동국대에 오시고 첫 결선 진출이라 의미가 남다르지 않았을까 싶어요."
달라진 입지와 맹활약 속에서도 김상윤은 냉정하게 스스로를 돌아봤다. 부족함을 채우기 위한 노력은 코트 안팎을 가리지 않고 현재 진행형이다.
"공격할 때 조금 더 과감하지 못했던 게 못내 아쉬워요. 제가 슈터라는 걸 다른 팀들도 다 아니까 견제가 엄청 심하게 들어오거든요. 상명대전에선 저보다 키 작은 친구 세 명이 번갈아 가며 바짝 붙어서 쫓아다니는데, 진짜 슛 하나 쏘기가 너무 어렵더라고요. 그때 제 대응이 아쉬워서 공부를 더 해야 한다고 느꼈어요. 매 경기 배우는 게 많아요."
집요한 밀착 수비를 파훼하기 위해 그가 꺼내 든 방법은 인공지능이었다. AI에게 고민을 묻고 스스로 돌파구를 찾아 나선 것이다. 누군가 답을 쥐여주길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상황을 분석해 해답을 찾아내는 그의 능동적이고 영리한 면모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요새 AI가 워낙 똑똑하잖아요. 그래서 물어보기도 하고, 감독님께도 많이 여쭤봤죠. 팀원끼리 안 됐던 부분을 소통하는 시간에 스크린을 어떻게 서면 내가 시도할 때 편할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거나 패턴을 만든다거나 그렇게 점점 좋아지게 개선해 갔어요."
무엇보다 팀에 활력을 불어넣은 건 그의 헌신적인 태도였다. 승패와 관계없이 항상 큰 목소리로 동료들을 독려하며 높은 에너지를 유지했다. 코트 위에서는 몸을 사리지 않는 허슬 플레이로 투지를 불태웠다. 특히 1대1 수비에서 상대를 거머리처럼 물고 늘어지는 끈질김으로 상대의 숨통을 조였다. 어떻게든 상대와 접촉을 유지하며 바깥으로 도망치듯 드리블을 치게 만드는 영리한 수비법까지 다듬어냈다.

개인적인 기량 발전뿐만 아니라, 4학년이 된 그에게는 '주장'이라는 새로운 무게까지 주어졌다. 학창 시절 부회장과 반대표를 도맡을 만큼 리더 역할을 즐기는 편이었지만, 대학 무대에서 팀을 이끄는 일은 또 다른 차원의 과제였다.
"아무래도 대학교 주장이 제일 힘든 것 같아요. 성인이라 각자만의 주관이 뚜렷하잖아요. 자리 잡힌 상태에서 모두의 의견을 한곳에 모아 좋은 결과를 도출해 내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았어요. 패턴이나 전술 하나를 정할 때도 끊임없이 의견을 묻고 수정하며 중재 역할을 해야 했죠. 까다로운 순간도 있었지만,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니까요."
이 조율의 과정에서 그가 터득한 리더십의 핵심은 다름 아닌 '화법'이었다.
"말을 예쁘게 하는 법을 배웠어요. 상대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다독이면서도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을 잘 전달해야 하거든요. 부드러운 카리스마라고 할까요? 주장직을 맡으면서 그런 소통의 기술을 많이 깨우쳤어요."

#003_Application
이제 김상윤에게 남은 것은 드래프트라는 마지막 관문이다. 드래프트는 지금까지 쌓아온 시간을 평가받는 자리인 동시에, 앞으로의 가능성을 직접 설명해야 하는 무대이기도 하다. 수많은 후보 가운데 김상윤이 내세우는 자신만의 가장 큰 무기는 단단하게 뭉쳐진 '성실함'이다.
"부산 사나이 특유의 악착같은 근성이 있기 때문에 뭘 해도 끝까지 해낼 자신이 있어요. 지도자 선생님들께서도 저를 평가하실 때 늘 '성실한 선수'라고 제일 먼저 꼽아주시거든요. 성실한 건 정말 중요하잖아요. 그리고 항상 긍정적인 마인드도 지녔어요."
그가 코트 위에서 지향하는 롤모델은 창원 LG의 '눈꽃 슈터' 유기상이다.
"수비를 굉장히 잘하시잖아요. 게다가 무리하게 공격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자기 역할에 맞게 정말 간결하게 플레이를 하세요. 그 모습을 보면서 '나도 꼭 저렇게 하고 싶다'고 느껴요."
반면 농구를 대하는 태도와 마인드 측면에서는 LG 양홍석을 절대적인 본보기로 삼고 있다. 두 사람의 인연은 김상윤이 처음 농구공을 잡았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가 처음 농구 시작했을 때 홍석이 형이 고등학교 3학년이셨는데 새벽에 천계단을 오르시더라고요. 팀 운동 쉬는 날이나 오전 운동이 없는 날에 저를 데리고 천계단을 같이 뛰기도 했어요. 홍석이 형이 천계단 다 올랐을 때 저는 300계단에서 헉헉대고 있었으니, 진짜 대단하다고 느꼈죠. 항상 열심히 하시고 후배도 잘 챙겨주시는데 실력도 갖췄잖아요. 그 모습을 보고 '나도 저런 농구선수가 되고 싶다'라고 생각해요. 제가 조금이라도 나태해질 때면 '홍석이 형도 저렇게 하시는데 내가 지금 이래도 되나' 스스로 다잡아요. 농구를 대하는 마인드가 정말 대단하신 분이에요."
어릴 적부터 우러러보던 선배와의 인연은 시간이 흘러 코트 위에서도 이어졌다. 김상윤이 3학년이던 해, 경북 대표로 출전한 제106회 전국체육대회 준결승에서 롤모델 양홍석이 있는 상무와 맞대결을 펼치게 된 것이다. 비록 양홍석은 이날 경기에 나서지 않았지만, 벤치에서 상대팀인 김상윤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우며 아낌없는 지지와 응원을 보냈다.
"상대 팀인데도 제가 잘할 때마다 벤치에서 엄지를 올리면서 응원해 주셨어요. 앞서 말씀드린 3학년 때, 농구를 그만둘까 고민하며 웨이트만 하던 시기가 있었거든요. 그때도 형이 '조금만 더 열심히 해보라'고 격려해 주셨는데, 그 한마디가 제겐 정말 컸어요. 힘들 때 좋은 말씀 해주셔서 감사해요."
수차례 흔들리며 멈춰 설 뻔했던 소년은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 어느덧 선배들의 든든한 발자취를 따라 프로 무대의 문을 두드리는 어엿한 선수로 성장했다. 코트 위에서 보여줄 유기상의 간결함과 코트 밖에서 품어야 할 양홍석의 지독한 성실함. 그는 이 두 가지 무기를 가슴 깊이 새겼다.

#004_My Future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먼저 그려보는 순간이 있다. KBL 입성을 꿈꾸는 드래프트 참가자들에게도 '프로 선수가 된 나'는 오래 품어온 가장 선명한 상상일 터다.
"팀에 꼭 필요한 조각이 되고 싶어요. 특출난 에이스는 아니더라도 팀에 활력소가 될 수 있는, 없어서는 안 되는 선수가 되는 것이 목표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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