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슬램게임] '림에 닿지도 않던 3점슛→만능 스코어러' 명지대 장지민이 에이스가 되기까지 (019)
- 아마추어 / 이연지 기자 / 2026-10-12 13:05:34

[점프볼=이연지 인터넷기자] 지금껏 농구 하나를 바라보며 달려온 여정은 이제 프로라는 다음 무대를 향하고 있다. '26슬램게임'은 KBL 드래프트를 향해 저마다의 시간과 가능성을 증명해야 하는 선수들의 이야기를 담는다. 이번 주인공은 명지대 4학년 장지민(183cm, G)이다.

#001_Scan: 명지대 장지민
만화 속 세상이 현실이 되기까지, 장지민에게 필요했던 건 오직 농구공 하나였다.
애니메이션 보기가 취미였던 장지민은 초등학교 4학년 무렵 문득 부모님 세대의 애니가 궁금해졌다. 가장 유명했던 '슬램덩크'를 우연히 찾아봤고, 이는 한 소년의 인생 궤적을 바꿔놓았다. 화면 속 선수들의 뜨거운 플레이와 팀워크에 매료된 그는 중학교 2학년부터 군산중의 유니폼을 입으며 정식으로 농구 코트에 발을 들였다.
"취미로만 하다가 제가 선수 하고 싶다고 계속 졸랐어요. 사촌 형이 농구를 했었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그 힘듦을 아셨거든요. 그래서 '진짜 힘들 건데 괜찮겠냐, 할 수 있겠냐'라며 반대하시기도 했어요. 그 어린 시절에는 솔직히 무서운 게 없으니까 난 '버틸 수 있다, 할 수 있다'고 했죠."
매번 챙겨보는 애니메이션에 따라 꿈이 바뀌던 아들이었기에, 그 열정이 이토록 오래갈 줄은 부모님조차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장지민은 한 번 움켜쥔 공을 놓지 않았다.
"저도 솔직히 어느 정도 하고 그만둘 줄 알았어요. 그런데 제가 한 가지를 하면 끝까지 파고드는 성격이거든요. 실수가 하나 나오면 될 때까지 계속했죠. 그러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실력도 늘고 재미도 더 붙어서 빠져든 것 같아요. 농구 자체가 너무 좋았어요."
넘치는 애정과 별개로 코트 위에는 현실적인 과제가 존재했다. 농구를 시작할 당시 장지민의 키는 158cm에 불과했다. 작은 체구를 보완하기 위해 그가 먼저 파고든 건 드리블이었다.
"유튜브에 '농구 영상' 이렇게 치면 영상이 엄청 나왔는데 그걸 하나하나 다 봤어요. NBA 영상도 챙겨봤고요. 근데 드리블을 치는데 공을 안 뺏기는 거예요. '와 진짜 멋있다' 하면서 드리블 영상을 찾아보고 무작정 다 따라 했어요. 기술 쓰면 주변에서 잘한다고 해주니까 어깨도 올라가고 좋았죠."

중학교 3학년을 앞두고는 더 탄탄한 기본기를 다지기 위해 '유급'이라는 결정까지 내렸다. 학교를 쉬는 동안 스킬 트레이닝을 받으며 드리블 기술을 더욱 정교하게 다듬는 데 집중했다.
하지만 드리블과 돌파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자신보다 키가 큰 선수들을 상대하려면 외곽슛을 장착해야 했다. 문제는 비거리였다. 장지민에게 3점슛 라인은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 공이 림에 닿지 않을까 봐 던지는 것조차 두려웠다. 그때 선배들이 다가와 "어떤 폼이라도 좋으니 일단 림을 향해 날려보라"며 힘을 실어줬고, 이 한마디는 성장의 기폭제가 됐다.
"놀랍게도 농구 시작할 때만 해도 3점슛이 안 날아갔어요. 키도 너무 작고 힘도 없어서 3점슛 쏘는 것 자체가 무서웠거든요. 그런데 어느 순간 조금씩 익숙해지더니 3학년쯤엔 날아가기 시작하더라고요. 계속 2점만 넣다가 3점이 들어가니까 신나서 미친 듯이 연습했어요. 제가 가진 근성을 발휘해서 매달렸더니 성공률도 확 늘었죠."
슛의 재미를 알게 된 후, 쉬는 날에도 훈련은 이어졌다. 아버지가 가장 든든한 훈련 파트너가 돼 스트레칭부터 패스 연습까지 도왔고, 슛을 연습할 때면 볼을 잡아줬다.
그 노력은 3학년 주말리그에서 라이벌 전주남중을 만났을 때 빛을 발했다. 풀타임을 소화한 장지민은 3점슛 7개를 포함해 35점 5리바운드 3어시스트 6스틸 2블록슛을 쏟아내며 83-55 완승을 이끌었다.
"중학교 3학년 때 주말리그 전주남중이랑 했을 때가 아직도 기억나요. 각 지역마다 라이벌이 있잖아요. 저희는 전주남중이 라이벌이었는데 계속 지다가 6년 만에 처음으로 이겼거든요. 그날 3점슛 감도 좋았고,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아버지가 아직도 그 경기를 돌려보세요."

군산고로 진학한 장지민은 뛰어난 1대1 능력과 쉽게 볼을 뺏기지 않는 안정적인 드리블, 동료의 기회를 살리는 이타적인 시야를 인정받아 본격적으로 팀의 1번(포인트가드)으로 육성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교 생활의 시작은 녹록지 않았다. 코로나19 여파로 1학년 때 대회가 줄줄이 취소되며 실전 기량을 뽐낼 기회를 통째로 잃었다.
1학년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맞이한 2학년, 이번에는 선수 부족이라는 현실적인 문제와 마주해야 했다. 당시 선수 수급에 난항을 겪은 군산고의 엔트리는 단 7명. 그중 2명은 일반 학생이었기에 실질적인 선수는 단 5명뿐이었다. 교체 멤버조차 없는 상황에 파울 트러블이나 부상에 대비해 농구를 이미 그만둔 선배를 벤치에 앉혀야 할 정도로 상황은 열악했다.
"저희는 딱 5명밖에 안 됐거든요. 농구를 중학교 때까지 하다가 고등학교 올라와서 그만둔 형이 있었어요. 대회를 5명만 나가면 모양이 빠지고, 혹시 4명이 됐을 때를 대비해서 코치님이 같이 가줄 수 있냐 하셔서 같이 대회에 나갔어요. 저희가 퇴장당했을 때 경기도 몇 번 뛰었을 거예요."
정통 센터조차 없어 선수 전원이 단신인 팀이었다. 교체 없이 40분을 모두 뛰어야 하는 상황 속에서 군산고는 인터벌과 러닝 중심의 강도 높은 체력 훈련을 바탕으로 한 '빠른 농구'로 승부를 걸었다. 전원이 리바운드를 잡자마자 달리는 전술로 악조건을 정면 돌파했고, 그해 연맹회장기 8강에 오르는 값진 성과를 거뒀다.
"솔직히 그때는 풀타임 뛰는 게 힘든 줄 몰랐어요. 다들 그렇게 뛰는 게 당연한 건 줄 알았어요. 인원이 없어서 코치님께서도 체력 운동을 중요시하셨고, 덕분에 체력만큼은 좋았어요."
3학년이 되자 주장의 완장까지 짊어진 장지민은 전 경기 선발로 출전해 볼 운반과 경기 운영을 도맡았다. 얇은 선수층과 높이의 열세로 팀 패배가 쌓이는 날이 많았지만, 그는 코트 위 모든 영역에서 조용히 자신의 기록을 쌓아갔다.
2학년 협회장기(17점 13리바운드 10어시스트)와 주말리그(31점 13리바운드 10어시스트)에서 연거푸 트리플더블을 기록했고, 3학년 주말리그에서는 4경기 연속 더블더블을, 왕중왕전에서는 35점을 폭발시키며 압도적인 득점력을 뽐냈다. 군산고 시절 쉼 없이 달려온 장지민은 어느새 부정할 수 없는 팀의 에이스로 뿌리내리고 있었다.

#002_Life in University
"저를 원하는 분이 있다는 게 정말 좋았어요."
고등학교 마지막 해, 자신을 유심히 지켜보던 김태진 감독의 부름은 장지민을 명지대로 이끌었다. 대학 무대는 모든 것이 낯설고 흥미로웠다. 5명이서 고군분투하던 고교 시절을 지나, 북적이는 동료들과 든든한 장신 센터들이 버티고 있는 대학 무대는 그에게 신세계였다.
"5명이서만 운동하다가 인원이 많아지니까 재밌었어요. 신입생 때 센터가 3명이었거든요. 군산고 때는 키 큰 선수가 없어서 '리바운드 내가 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대학교 오니까 준 해리건(손준) 형이 위에서 리바운드를 다 잡아주는 거예요. 정말 멋있었어요. 덕분에 슛도 편하게 던질 수 있어서 더 잘 들어갔던 것 같아요."
신입생 장지민의 잠재력을 꿰뚫어 본 김태진 감독은 그를 곧바로 '집중 조련' 대상으로 낙점했다. 그는 동계 훈련 내내 홀로 '납조끼'를 입고 훈련을 하게 됐다.
"처음에 딱 입었을 때 '뭐야 괜찮은데? 나 좀 센가?' 싶었어요(웃음). 그런데 세 바퀴쯤 뛰니까 점점 땅으로 저를 끌고 내려가는 느낌이 들어서 당황했죠. 엄청 힘들긴 했는데, 저한테 관심을 가져주시는 거니까 기분이 좋았어요. 동계 내내 그렇게 하니까 힘도 길러지고 치고 나가는 스피드가 늘었어요."
탄탄하게 피지컬을 다진 채 부푼 마음으로 맞이한 개강 날. 대학 무대의 로망을 꽃피우기도 전에 불청객이 먼저 찾아왔다. 훈련 도중 점프 후 착지 과정에서 선배의 발을 밟아 발목이 완전히 돌아간 것이다. 인대 2개가 파열되는 큰 부상을 입어 농구 인생 첫 수술을 하게 됐다.
"날짜도 못 잊어요. 3월 2일 개강 날이었거든요. 발목이 엄청나게 부어서 깜짝 놀랐어요. 다음 날 병원에 갔더니 수술해야 한다더라고요. 매번 접질린 정도였는데 그렇게 크게 다친 건 처음이었어요. 재활할 때 선배 형들이 좋은 말을 많이 해줬어요. 그래서 멘탈 잡고 한 단계씩 올라갔던 것 같아요. 제가 옆에서 좋은 이야기를 해주면 금방 괜찮아지는 성격이거든요."
두 달간의 재활 끝에 5월 30일 건국대전에서 마침내 데뷔 경기를 치렀다. 부상으로 출발이 늦어진 탓에 1학년 출전은 4경기에 그쳤다. 하지만 얇은 선수층의 명지대에 그는 반가운 활력소였다.
"복귀한 뒤에는 감독님이 주문하시는 플레이를 잘하는 선수가 되는 게 목표였어요. 첫 경기 때는 정신이 없었어요. 설레기도 했는데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심해서 긴장도 됐어요. 사람도 많이 와 있는 데다 너무 잘하고 싶은 욕심이 크다 보니, 흥분해서 플레이가 잘 안 나왔어요."

2학년이 되며 출전 시간은 눈에 띄게 늘어났지만, 이번엔 또 다른 벽에 부딪혔다. 군산고 시절 몸에 밴 '혼자 해결하려는 습관'이 문제였다.
"수비 상황을 안 보고 마음대로 해서 많이 혼났어요. 고등학교 때는 플레이할 사람이 저밖에 없으니까 리바운드 잡고 무조건 제가 끌고 가는 게 당연했거든요. 그런데 감독님은 그런 걸 좋아하지 않으셨어요. 리바운드 잡으면 앞에 있는 사람을 주라고 주문하셨죠. 몸에 배어 있어서 ‘안 해야 한다’라고 되뇌어도 계속 그렇게 돼서 스스로 너무 힘들었어요. 결국 많이 뛰면서 고치는 수밖에 없었어요. 3학년 때 조금씩 고쳐진 것 같아요."
대학 무대 특유의 디테일한 수비 전술과 상황별 판단까지 더해지자, 혼란은 가중됐다. 답답함 속에서 장지민이 꺼내 든 해답은 고교 시절부터 틈틈이 써오던 '농구 일지'였다. 코트 위에서 지적받은 문제점과 복잡한 수비 패턴을 노트 위에 직접 그리고 적어 내려갔다. 머릿속에 엉켜있던 실타래가 글로 정리되면서, 그는 서서히 수비와 상황 판단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야가 트인 3학년, 이번엔 무심코 접하게 된 짧은 영상 하나가 그의 득점 본능에 불을 지폈다.
"스테판 커리 영상 하나에 완전히 꽂혔어요. 3점슛을 너무 잘 넣길래 어떻게 쏘는 건지 계속 찾아봤죠. 결론은 '연습밖에 답이 없다'였어요. 그래서 새벽에 나가서 슛 연습을 엄청 많이 했어요. 마음에 들 때까지 계속 쐈어요."
새벽 공기를 가르던 슛은 실전에서 결과로 나타났다. 3학년 때 37.7%까지 끌어올린 3점슛 성공률은 4학년이 된 올 시즌, 시도 자체를 두 배 가까이 늘리는 자신감으로 이어지며 득점 상승의 도화선이 됐다. 개막전 25점을 시작으로 리그 7경기 연속 20점 이상을 쏟아부었고, 상명대전에선 3점슛 7개 포함 31점을 폭발시켰다. 그는 그렇게 평균 22.31점으로 전반기 대학리그 '득점 1위' 자리를 꿰찼다.
"시즌 초반에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어요. 중반쯤 지나니까 주변에서 득점 1위라고 알려줘서 찾아보니 진짜 1위에 제 이름이 있더라고요. 물론 1등 하면 기분 좋으니까 어느 정도 욕심이 생겼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에이스 안 해도 되니까 다 같이 농구 열심히 해서 팀이 이겼으면 하는 마음이 더 커요. 계속 지는 게 너무 속상하거든요."

팀의 잦은 패배 속에서도 그가 빛나는 이유는 단순히 기록지 위에 찍힌 숫자 때문이 아니다. 경기가 풀리지 않아도 절대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먼저 소리치고 궂은일에 몸을 던지며 코트의 공기를 스스로 바꿔낸다.
"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경기가 안 풀린다고 속상해하면 달라지는 게 없잖아요. 그래서 억지로라도 에너지를 끌어올리려는 마음가짐을 갖고 있어요."
그렇게 장지민은 만능 스코어러로 도약했다. 볼 없는 상황에서는 백도어 컷인으로 상대의 허를 찌르고, 페이크 동작 후 순간적인 림 어택과 오른발 스텝을 활용한 레이업은 정확도를 더했다. 특히 상대 센터와 미스매치가 발생했을 때 망설임 없이 시도하는 풀업 3점슛은 한 번 물꼬가 트이면 위치를 가리지 않고 연이어 터졌다.
여기에 왕성한 활동량을 바탕으로 리바운드에 가담하고, 상대의 패스 길을 읽고 차단해 곧바로 속공으로 전개하는 농구 센스까지 갖췄다. 팀 득점의 절반 이상을 책임지기에 쏟아지는 집중 견제 속에서도 그는 묵묵히 풀타임을 소화하며 제 몫을 해냈다.

이처럼 단단하게 무르익은 기량은 그에게 생애 첫 태극마크라는 선물까지 안겨주었다. '이상백배 대표팀'에 선발된 것이다.
"기분이 진짜 너무 좋았어요. 유니폼을 딱 받았는데 너무 멋있는 거예요. 팬분이 유니폼 키링도 만들어주셔서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어요. 무엇보다 다들 농구에 진심인 게 눈에 보여서 확실히 다르다는 걸 느꼈어요. 마인드도 배웠고, 실력은 말할 것도 없이 다 잘하는 선수들이죠. 하루하루가 다 재밌었어요. 같이 이야기 나누는 것도, 어딘가를 가는 것 등 사소한 것도 다 즐거움이었어요."
그 모든 과정의 한가운데에는 혜안을 틔워준 든든한 멘토인 김태진 감독이 있었다. 장지민이 농구 인생에서 가장 큰 성장을 이룬 시기로 명지대를 주저 없이 꼽는 이유이기도 하다.
"저한테 정말 은사님이세요. 혼내실 때도 많았거든요. 저학년 때는 왜 계속 혼내실까 싶었는데 고학년이 되니까 그게 다 관심이고 애정이 있어서 말씀해 주시는 거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고등학교 때까지는 솔직히 농구를 세부적으로 알지 못했어요. 그냥 슛 쏘는 게 다인 줄 알았는데 대학에 올라와서 전술적인 부분, 수비 등 디테일하게 배우니까 머리가 아팠죠. 그만큼 큰 가르침을 주셨어요. 기본적인 움직임부터 상황 판단하는 것, 농구 전체적으로 많이 성장했어요."
"추억도 많아요. 저희는 시즌이 끝나면 다 같이 강릉으로 워크숍을 가는데 매년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 와요. 모여 앉아서 다음 시즌 어떻게 준비할지 각자의 생각을 나누는 시간을 갖는데 그게 좋았어요. 감독님께서 저희 이야기를 귀담아듣고 수용해 주셔서 존경스러웠죠."
대학 무대에서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려던 찰나, 부상 악재가 덮쳤다. 시즌 초 거제 동계훈련 당시 그가 가장 바랐던 건 부상 없이 즐기며 마지막 시즌을 보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바람은 시즌 막판 찾아온 부상 앞에서 멈춰 섰다.
지난 8월 5일 창원 LG와 연습경기 도중 왼쪽 발목이 돌아가 이어진 서울 SK, 고양 소노와의 연습경기에 모두 결장해야 했다. 재활에 매진한 끝에 후반기 첫 경기에 맞춰 복귀했지만, 9월 연세대전에서 착지 도중 과거 수술했던 오른쪽 발목이 바깥으로 꺾이며 결국 시즌 아웃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힘들 때일수록 웃기'라는 좌우명을 다시 한번 새겼다.
"다친 날에는 뭔가 못 이겨낼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어떡하지'라는 생각에 침울했어요. 너무 걱정돼서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어요.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요.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걸 해야죠. 발목 재활을 하면서 약점인 웨이트를 보완하려고 하고 있어요."
팀의 유일한 4학년이자 주장. 평소 카리스마로 중심을 잡기보다 따뜻함으로 팀을 품었던 그의 리더십은 시련의 순간, 후배들의 위로로 되돌아왔다.
"제가 방을 혼자 쓰는데 후배들이 제 방에 계속 와서 같이 있어 주더라고요. 너무 고마웠어요. 주장인데 힘들어하면 애들이 더 힘들어할까 봐 평소보다 장난도 더 많이 치고 힘내려고 하고 있어요. 원래도 후배들이 저 혼자인 걸 알아서 어디 갈 때 같이 가자고 해주면서 신경을 많이 써줬어요. 오히려 저를 챙겨줬죠. 감독님, 코치님께서도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말아라. 지금까지 잘해왔으니까 잘될 거다'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너무 감사해요."

#003_Application
이제 장지민에게 남은 것은 드래프트라는 마지막 관문이다. 드래프트는 지금까지 쌓아온 시간을 평가받는 자리인 동시에, 앞으로의 가능성을 직접 설명해야 하는 무대이기도 하다. 수많은 후보 가운데 장지민이 내세우는 자신만의 가장 큰 무기는 폭발적인 '순간 스피드'를 활용한 날카로운 '드라이빙' 능력, 그리고 어떤 가르침이든 스펀지처럼 흡수하는 '태도'에 있다.
"제 장점은 순간 스피드가 좋아서 드라이빙이 잘 된다는 점이에요. 그리고 무엇보다 '잘 받아들일 줄 아는 선수'가 되고 싶어요. 완벽하게 해내지는 못하더라도, 감독님이나 코치님이 지시하신 건 무조건 다 해내야 한다는 마인드로 임하거든요. 배움을 제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편이에요."
이러한 수용력은 자신의 빈틈을 마주하는 태도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코트 전체를 아우르는 리딩 능력과 경기 흐름을 읽는 시야가 아직 부족하다는 점을 인정하고, 그 여백을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배움의 자세를 잃지 않고 있다.
"솔직히 리딩을 채우지는 못한 것 같아요. 지금도 배우는 중이에요. 경기 흐름을 읽는 게 어렵더라고요. 중요한 순간이 오면 생각이 많아지는데 그게 마이너스인 것 같아요. 감독님께서도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네가 다 하려 하지 말고 팀을 믿어라'라고 말씀해 주세요. 영상도 많이 찾아보면서 공부를 많이 해야 해요."
더 높은 곳으로 도약하기 위해, 그가 나침반으로 삼은 롤모델은 군산고 선배이자 현재 KBL을 대표하는 가드 이정현(고양 소노)이다. 흔들림 없는 단단함을 빼닮고 싶기 때문이다.
"이정현 선수가 멋있어요. 정현이 형은 항상 웃고 계시잖아요. 웃상인데 엄청 강한 느낌이 들어요. 사람 자체가 안에서부터 빈틈이 없는 단단한 사람 같아요."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먼저 그려보는 순간이 있다. KBL 입성을 꿈꾸는 드래프트 참가자들에게도 '프로 선수가 된 나'는 오래 품어온 가장 선명한 상상일 터다. 장지민 역시 그 장면의 끝에 한 가지 목표를 또렷하게 적어두었다.
"프로에 가는 건 어렸을 때부터 품어오던 오랜 꿈이잖아요. 관중이 꽉 차 있고, 조명도 경기장을 비추는 그런 코트를 밟는 상상을 자주 하곤 해요. 직접 밟으면 정말 좋을 것 같아요. 프로에 가서 성실한 모습 보여드리고, 부족한 웨이트도 더 채우고 싶어요. 경기를 뛰어보는 것이 제 목표예요. 나아가서 신인상도 받아보고 싶어요."
'슬램덩크'를 보며 처음 농구공을 잡았던 소년은 어느덧 만화 속 주인공을 쏙 빼닮은 선수로 성장했다. '포기를 모르는 남자' 정대만처럼, 림에 닿지도 않던 공을 밤낮없이 던져 최고의 스코어러로 거듭났고, 부상 앞에서도 결코 주저앉지 않았다. 그저 다음을 바라보는 피나는 근성으로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해 낸 장지민. 앞으로 펼쳐질 그의 다음 페이지가 기다려지는 이유다.
#사진_점프볼DB, 이연지 인터넷기자, 장지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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