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했지만 좋은 경험이었다” 옥범준의 농구인생은 지금부터

프로농구 / 최창환 기자 / 2022-11-15 06: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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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프볼=최창환 기자] 드래프트에서 2순위로 지명되는 등 많은 기대를 받았던 것과 달리, 프로선수 옥범준(41, 174cm)의 커리어는 순탄치 않았다.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 한때 농구의 농자도 꺼내지 않을 정도로 농구를 멀리했다. 이와 같은 쓰린 경험도 스킬트레이너 옥범준에겐 소중한 자산이 됐다. 그는 스킬트레이너부터 제천농구협회 고문, 유튜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새로운 삶을 걸어가고 있다.

농구는 어떤 계기로 시작했나?
4살 터울의 형이 중학교 2학년까지 선수생활을 했다. 초등학교 시절 동료가 임재현 선배였다.형 덕분에 나도 자연스럽게 농구를 접했고 대방초 4학년 때 시작했다. 형은 초등학생 때부터 키가 180cm 가까이 됐는데 나는 어릴 때도 작았다. 그래서 부모님이 반대했지만 워낙 농구를 좋아했다. 형은 운동신경이 부족했지만 나는 키가 작은 대신 재능, 열정이 있었다. 농구를 시작한 날 될 때까지 연습해서 레이업슛을 익혔다. 다음날에는 왼손 레이업슛을 될 때까지 했다. 노력하면 이룰 수 있다는 걸 어릴 때 깨달았다.

대방초 재학 시절부터 유망주로 두각을 드러냈는데?
당시 SBS 방송국 개국을 기념해 열린 전국대회가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출전해 대회 MVP를 받았다. ‘농구 신동’이라며 스포츠뉴스와 인터뷰해서 자신감도 얻게 됐다. 이후 학창 시절 내내 가드 랭킹은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갔다. 초등학교 때는 강동희 감독님과 매직 존슨이 롤모델이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김)승현이 형, 제이슨 윌리엄스처럼 화려한 농구를 좋아했다. 승현이 형을 송도고 다니실 때 처음 봤는데 ‘나도 저렇게 농구를 해야겠다’라고 느꼈다. 그때 승현이 형은 사람이 아니었다. 너무 잘했다. 키가 작아 프로에서 안 통할 거란 얘기도 있었지만 나는 승현이 형이 최고가 될 거라 생각했다.

연세대, 중앙대, 한양대로부터도 제의를 받았는데 성균관대에 진학한 배경은?
아버지와 상의 끝에 연세대로 결정을 내린 상태였는데 갑자기 다음 날 진로가 바뀌었다. 여러 이유가 있었고 마음 한구석으로 연세대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긴 했다. 성균관대는 명문이 아니지만 낙생고 3인방(정훈, 진경석, 이한권)이 있는 반면, 가드는 부족한 팀이었다. ‘내가 가면 우승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주위에서 “네가 마지막 퍼즐이다”라는 얘기도 많이 하셨다.

낙생고 3인방은 여전히 아마농구 팬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 그들과 함께 한 성균관대 시절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있나?
정말 대단한 선수들이었다. 선배들이 워낙 잘해서 나는 경기운영만 신경 쓰면 됐다. 우승을 꼭 한번 해보고 싶었는데 2학년 때 MBC배에서 학교 역사상 첫 우승을 했다. 당시 결승에서 꺾은 중앙대는 김주성 선배를 앞세워 전승 행진을 이어갈 때였다. 농구인생을 돌아봤을 때 제일 기분 좋은 순간이었다. 한편으로는 슬럼프의 시작이기도 했다. 피로골절, 십자인대 부상 때문에 몸 상태가 안 좋았지만 주사를 맞아가면서 뛰었다. 우승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그만큼 강했기 때문이었지만, 그래서 MBC배 이후 2학년 시절을 거의 다 버렸다. 그때 이후 부상이 잦았다. 은퇴할 때까지 양쪽 발목 각각 2번씩 총 4번 수술했다.

얼리 엔트리 1세대다. 3학년 때 드래프트에 참가하게 됐던 배경은?
2학년 내내 쉬다 보니 살도 찌고 방황도 많이 했다. 가정사까지 겹치다 보니 3학년 진학하기 전 농구를 그만둔다고 했다. 부상이 반복되니 농구도 안 되고 하기 싫어졌다. 그러자 박성근 감독님이 “1년만 뛰면 학교 동의서 받아서 드래프트에 보내주겠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1년을 참고 뛰었다. 운동하다 보니 몸이 잘 만들어졌고, 나도 팀도 성적이 잘 나왔다.

2003 드래프트 전부터 유력한 2순위 후보로 전망됐고, 실제로 김동우에 이어 2순위로 코리아텐더(현 KT)에 선발됐다.

정말 예상 못했다. 기사에 계속 2순위 후보라고 나오는데 ‘내가 진짜 그 정도가 되나?’ 싶었다. 가정형편이 어렵고 여러 상황이 겹쳤던 터라 2, 3라운드라도 뽑히면 죽기 살기로 해보자는 마음이었다. 승현이 형 영향이 컸던 것 같다. 이전까지 단신에 대한 편견이 있었는데 그걸 깨주셨고, 덕분에 나도 높은 순위로 뽑혔다. 당시 안 알려진 비화도 있다. 드래프트에 함께 참가한 동기 중 이원호라는 선수도 있었다. 박성근 감독님이 뽑히면 (이)원호도 갈 수 있게 얘기 좀 해달라고 하셨는데 단상에 오르니 그게 기억이 났다. 이상윤 감독님과 악수하며 “(이)원호 좀 뽑아주시면 안 됩니까?”라고 말씀드렸다. 지금 생각하면 해선 안 될 미친 짓을 했다(웃음).

※ 이원호는 3라운드 2순위로 코리아텐더에 지명됐다.

코리아텐더가 KTF에 인수돼 안정적인 환경에서 데뷔시즌을 맞았는데 기대에 못 미쳤다.
내 인생의 전환점이 그때였다. 안 좋은 의미의 전환점이었다. 3학년 마친 후 기대를 받다 보니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며 술도 많이 마셨다. 몸 관리를 못했다. 그래도 팀에 입단한 후에는 훈련을 잘했다. (현)주엽이 형과 호흡을 잘 맞춰가고 있었고, 네덜란드 전지훈련도 잘 마쳤다. 전지훈련 후 추일승 감독님이 사흘 정도 휴가를 주셨다. 그때 한강에서 길거리농구하며 땀 좀 빼려고 했는데 거기서 발목이 아작났다. 인대가 끊어졌고 발등까지 다쳤다. 그게 내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순간이다. 그때 다치지 않았으면 인생이 바뀌지 않았을까. 시즌아웃이라 해도 무방한 부상이었는데 참고 뛰었다. 그러다 보니 실력도 안 나왔다.

데뷔 시즌 마친 후 곧바로 상무에 갔고, 제대 후에는 신기성의 백업 역할도 어느 정도 하며 챔피언결정전도 출전했다. 처음이자 마지막 챔피언결정전이 됐지만….
상무에서 수술, 재활을 하다 보니 몸이 좋아졌다. 동아시아대회 대표팀에도 선발됐다. (신)기성이 형 백업으로 나름 선방했는데 챔피언결정전 끝난 후 곧바로 2대1 트레이드(양희승↔황진원, 옥범준)되며 KT&G(현 KGC)로 옮겼다. 가자마자 또 발목을 다쳐 시즌아웃 됐다. 그게 3번째 수술이었다. 복귀 후 감독도 바뀌고, 가드도 보강이 되면서 KT&G에서는 많은 시간을 소화하지 못했다.

2010년 FA가 되며 SK와 2년 4000만 원에 계약했다. 절치부심하며 2010-2011시즌을 준비했을 것 같다.

젊을 때였기 때문에 ‘아직 기회는 있다’라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합류 사흘 만에 손가락이 부러졌다. 핀을 박는 수술을 해서 3개월 동안 연습경기를 못 뛰었다. 하지만 처자식이 있었기 때문에 악착같이 훈련했다. 깁스한 채 새벽부터 야간까지 훈련했다. 깁스 제거하면 바로 연습경기 뛰겠다는 각오였다. 그렇게 준비하니 복귀 후 컨디션이 정말 좋았다. 연습경기에서 20~30점 넣을 때도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허리에서 ‘뚝’ 소리가 났다. 그게 끝이었다. 척추에 문제가 생겼는데 걷지도 못할 정도의 부상이었다. 계약기간이 1년 남았을 땐 문경은 2군 코치님이 감독대행이 됐다. 나에게 선택권을 주셨고, 이대로 물러날 순 없다는 마음에 마지막 기회를 얻었다. 그런데 훈련 이틀 만에 허리를 또 다쳤다. 더이상은 자신이 없었고, 아내와 상의 후 은퇴를 결정했다. 그래도 잔여 연봉은 지급을 받았고, SK에서는 유소년 코치도 제안해주셨다. 그 부분은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은퇴 후 한동안 힘든 시간을 보낸 것으로 알고 있다.
많이 방황했다. 자존심, 고집이 셌다. 내 생각이 맞다면 선배에게도 안 굽히는 편이었다. ‘경쟁에서 이기면 된다’라는 생각으로 농구를 해왔는데 프로에서 보여준 게 많지 않아서 괴로웠다. 나 자신에게 화도 나고 지인들을 만나는 것도 두려웠다. 농구의 농자도 꺼내기 싫었다. 당시 연희동에 살고 있었는데 처갓집이 제천이었다. 그래서 다 정리하며 제천으로 내려갔고, 3개월 동안 집에서 쉬기만 했다.

농구와의 인연은 어떻게 다시 이어진 건가?
희한하게 3개월 동안 아무것도 안 하니까 몸이 좋아졌다. 마침 집 근처에 코트가 있어서 재미 삼아 농구를 했다. 은퇴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라 알아보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아닙니다”라고 계속 잡아뗐다. 시골이다 보니 입소문이 나면서 방과 후 강사 제의가 들어왔고, 이를 계기로 제천시체육회에서 1년 정도 근무했다. 월급은 많지 않았지만 사업계획서 작성, 행사 진행, 결제 등 생전 처음 해보는 일을 많이 배웠다. 직접 팬 사인회도 열었고, SK 시절 인연 덕분에 김민수와 김선형도 부를 수 있었다. 제천의 농구 저변 확대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봤다. 직접 페인트 사서 길거리 코트 라인도 그렸다. 그러다 보니 2013년쯤 옥범준 농구교실도 열게 됐다.

이후 제천시농구협회 고문은 어떻게 해서 맡게 된 건가?
처음에는 내가 사무국장이었다. 지역에 동호회 팀 500개 이상, 선수 300명 이상이 있어야 협회를 만들 수 있는데 2년 정도 내 돈 투자하면서 만들었다. 지금은 (제천시농구협회가)자리를 잘 잡은 상태다. 학업의 끈도 놓고 싶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 못 한 상태였기 때문에 재입학해서 졸업했고, 졸업하니 대학원도 가보고 싶었다. 그래서 충북대에서 체육교육과 관련해 논문을 쓰며 대학원을 다녔다. 2016년까지 진짜 바쁘게 살았다.

이름을 딴 OBJ 스킬트레이닝센터는 언제 설립한 건가?
대학원을 졸업하니 농구교실 뿐만 아니라 엘리트 선수들도 가르쳐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사실 열망은 이전부터 계속 있었는데 하루는 일면식도 없는 학부모에게 연락이 왔다. 자녀가 울산에 있는 초등학교 선수인데 나에게 스킬트레이닝을 받고 싶다고 했다. 나는 전문 스킬트레이너도 아니어서 얼마를 받아야 하고, 몇 시간을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저렴한 가격으로 2시간 가르쳐보니 너무 재밌더라. 그때부터 국내뿐만 아니라 외국에 있는 스킬트레이닝 영상을 많이 찾아봤다. 그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스스로 확고한 철학, 지식이 없는데 아이들을 가르칠 순 없었다. 그래서 내 돈으로 미국 LA에 가서 트레이닝 연수를 받고 왔다. 거기서 제이슨 라이트도 만났다. 연수를 다녀온 후 제천에 처음으로 스킬트레이닝 지점을 오픈했다. 이후 영주, 대구, 광주에서도 활동했다. ‘OBJ 스킬트레이닝센터’라는 이름으로 정식 오픈한 건 2020년 부천, 오산점이다.

KBL, WKBL 드래프트 참가자들도 스킬트레이닝을 받았다고 들었다. 스킬트레이닝센터 운영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뭐라고 생각하는지?

서커스 하거나 멋 부리는 게 아니다. 실력 향상에 도움이 돼야 한다. 겉으로 보기에 화려한 게 아닌 실전에서 쓸 수 있는 스킬을 알려줘야 한다. 그걸 얼마나 효율적으로, 빠르게 습득해 실전에서 구사하도록 만드느냐가 중요하다.

프로에서 기대만큼의 모습을 못 보여준 것에 대한 아쉬움은 많이 남을 것 같다.
너무 많았다. 고등학교 때까진 농구에 미쳐 살았다. 농구공을 안고 잘 정도로 농구만 생각했는데 대학 때 늦바람이 들었던 것 같다. 뒤늦게 풍파를 이겨내려고 노력했지만 안 됐다. 자기관리가 부족해 수술을 많이 받았고, 그러다 보니 악순환도 반복됐다. 결국 다 핑계다. 그래도 지금의 나에겐 큰 교훈이 됐다. 선수 시절 어리석었던 행동들도 밑거름이 됐다. 항상 많은 관심을 받다가 프로에 갔는데 빛을 못 봤다. 그래서 벤치멤버들, 출전명단에도 못 들어가는 선수들 등 성공하고 싶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은 이들의 마음을 알게 됐다. 그게 아이들을 가르칠 때 많은 도움이 된다. 아이들의 멘탈을 어루만질 수 있고, 선수별로 맞춤식 트레이닝도 할 수 있다. 선수로 실패했지만 좋은 경험이었고, 그걸 발판삼아 현재에 충실하며 지내고 있다.

선수생활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선수는?
아무래도 초등학교, 중학교를 같이 다닌 (양)동근이다. 그땐 나 때문에 경기를 많이 못 뛰었고 키도 작았다. 귀만 컸다(웃음). 하지만 동근이는 성실함, 근성이 남달랐다. 짓밟혀도 포기하지 않고 일어서는 느낌이었다. 그러다 용산고에 진학한 이후 오랜만에 동근이를 봤는데 키도 많이 자랐고, 기량도 좋아졌다. 나는 대학 때 마음 놓고 놀았지만 동근이는 학교에 남아 개인훈련하며 자기관리를 철저히 했다. 성격, 리더십은 어릴 때부터 좋았다. 프로에서 만났을 땐 나는 내리막길, 동근이는 저 위에 있었다. 질투가 아니라 ‘얘는 성공할만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실함을 바탕으로 최정상을 찍은 선수였다. 농구인들도, 이제 막 농구를 시작한 아이들도 동근이를 본받아야 한다.

‘닥터 OBJ’라는 유튜브 콘텐츠에 출연하고 있다. 콘셉트가 독특하던데 어떻게 기획하게 된 건가?
은퇴한 선수들의 근황을 다루는 영상에 출연한 게 계기가 돼 고정 출연하게 됐다. 초창기에는 40대들에게 농구를 알려주는 콘텐츠였는데 조회수가 낮았다. 의사 콘셉트로 진단하고 솔루션까지 내리는 건 내가 3년 전부터 생각해왔던 콘셉트였다. 6개월 정도 만들었는데 조금씩 반응이 오고 있다. (조용한 이미지여서 ‘닥터 OBJ’를 보며 많이 놀랐다.)주위에서도 “너한테 그런 면이 있었어?”라고 하더라. 나도 이렇게 미친 짓을 할 줄 몰랐다(웃음).

향후 목표는?
부천, 오산에서 운영한 스킬트레이닝센터는 대관해서 운영한 곳이었다. 엘리트선수들을 대상으로 운영했고, ‘닥터 OBJ’도 촬영하며 인지도도 점차 높아졌다. 대관이 아닌 내 체육관을 갖고 싶었는데 우연치 않게 퍼시픽스포츠그룹이라는 회사를 알게 됐다. 이곳을 통해 단독 브랜드로 입점해 내년 1월부터 퍼시픽스포츠그룹 내에서 OBJ 스킬트레이닝센터를 운영할 계획이다.

#사진_문복주 기자, KBL 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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