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ssic 100회] '원조 컴퓨터 가드' 농구선수 유재학
- 프로농구 / 박선희 / 2015-05-28 17:52:00

[점프볼 박선희 기자] KBL 최고의 명장 유재학 감독, 그는 현역 최고의 농구감독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지난시즌 울산 모비스를 3년연속 우승으로 이끈 감독입니다 유재학 하면 농구감독의 이미지가 떠오르는건 당연한겁니다 그러나 이런 유감독도 현역시절이 있었고 그저그런 선수가 아닌 스타플레이어였습니다
그와 동시대에 뛰었던 선수들은 유감독이야 말로 포인트 가드가 갖춰야할
어시스트능력과 리딩능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는 얘기를 합니다
안정적인 드리블과 위기의 순간에 한방을 꽂아넣는 강심장까지!
말로만 듣고 그 시절 유감독의 선수시절을 못 봤던 젊은 세대들에게
다소 부족한 자료들이지만 유감독의 선수시절의 모습을 모아 영상을 묶어봤습니다
농구감독이 아닌 농구선수 유재학의 모습
영상으로 확인하시죠~
[점프볼=편집부] ‘천재는 단명’ 이랬던가. 농구 선수 인생으로서는 짧은 시대를 풍미했던 유재학(46). 현역 선수 시절 그는 타고난 천재였다. 농구공을 잡았던 순간부터 그에게는 찬사가 쏟아졌다. ‘천재’, ‘컴퓨터’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붙었다. 선수시절 언제나 최고의 자리에 있었던 그의 플레이는 본능적인 움직임이었고,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이었다. 명장 유재학에 가려진 선수 시절, 그는 작은 거인이었다.
※ 본 기사는 서민교 MK 스포츠 기자가 월간 점프볼 2009년 12월호에 실은 기사입니다.
숨길 수 없었던 천재성
타고난 천재는 어려서부터 눈에 띄었다. 어려서부터 성숙했던 유재학은 또래가 아닌 머리 하나가 더 큰 형들과 함께 어울리며 농구공을 잡았다. 동그란 것만 있으면 고사리 같은 손으로 움켜잡고 농구를 흉내냈다. 지휘봉을 잡으며 ‘만수(萬數)’라는 칭호를 얻은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했다. 농구를 하면서도 팬을 놓지 않았다. 농구와 공부의 갈림길에서 그의 선택은 숨길 수 없는 그의 재능이었다.
Q.농구와의 첫 인연이 궁금합니다.
A.어려서부터 이상하게 중학교 형들하고 농구를 했어요. 사실, 농구라고 할 수는 없죠. 그때는 농구 골대가 없었기 때문에 건물 벽이 튀어나온 곳만 있어도 그게 골대였어요. 거기에 맞추면 골인인거죠. 농구는 그렇게 시작했어요. 그 뒤로는 동그란 것만 있으면 닥치는 대로 농구를 했죠.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그냥 나가서 했으니까요. 학교에서도 쉬는 시간만 되면 뛰어나갔죠. 그렇게 재밌더라고요.
Q.본격적으로 농구부에 들어간 것은 언제죠?
A.초등학교(서울 상명초) 3학년 때 학교에 농구팀이 있었어요. 학교에서 단체로 응원도 갔는데 정말 멋있어 보이더라고요. 3년 터울의 형이 반장이었는데, 담임선생님이 농구부 감독이었어요. 저를 부르시더니, 좋으면 해보라고 하더라고요. 정식 농구는 그때 시작했어요.
Q.부모님의 반대는 없었나요?
A.특별한 반대는 없으셨어요. 부모님도 좋으면 취미로 하라고 하신 거죠. 피아노, 바이올린, 태권도도 했었는데, 제가 신장이 좋지 않아서 운동을 하지 말라고 했었거든요. 건강 때문에 걱정만 하신 거죠.
Q.학업 성적도 좋았다고 알고 있어요. 농구 특기생 지망에 있어서 고민이 되기도 했을텐데요.
A.6학년 때까지 잘했죠. 특기생으로 진학을 할지 공부로 진학을 할지를 두고 한참을 고민했어요. 아버지께서는 운동 그만하고 공부하라고 하셨죠. 그런데, 용산중학교에서 수시로 집에 찾아왔어요. 결국 조건을 내걸고 특기생 진학을 결정하셨죠. 학교 수업을 빠지거나 때리면 안 되고, 학원이나 과외도 할 수 있도록 6시까지만 운동을 한다는 조건이었어요. 안 그러면 안 시킨다고요. 그래서 전 중학교 때 한 대도 안 맞고 운동을 했어요.
Q.초등학교 때부터 재능이 특출 났었나 봐요?
A.초등학교 졸업할 때 키가 167cm이었는데, 가드부터 포워드, 센터까지 다 했어요. 키도 큰 편이었으니까요. 중학교에서 난리가 난 거죠. 4학년 때 장충체육관에서 벤치에 앉아 있다가 처음으로 교체돼 코트에서 뛰었는데, 정말 좋았어요. 그 때 재능을 느끼기 시작한 것 같아요.
Q.그때부터 농구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으신 건가요?
A.초등학교 5, 6학년 때인가, 전남 사치분교에 잘하는 애들이 많았어요. 결승전에서 만났는데, 모든 포커스는 그 친구들한테 맞춰져 있었죠. 중계방송도 있었고, 신문사에서도 나왔을 정도로 비중이 있는 대회였어요. 그 경기에서 제가 혼자 다 한 거죠. 인터뷰도 모두 저한테 오더라고요. 신동이라기보다는 소질이 있긴 했던 것 같아요. 남들보다 빨리 늘고 잘 했으니까요. 아마도 농구를 좋아해서 그런 것 같아요.
Q.기본기를 익힐 어린 시절 재능을 발휘하는 것이 쉽지 않은데요. 당시 운동 분위기는 어땠나요?
A.상명초는 사립학교였어요. 아마 선생님이 때리거나 훈련을 힘들게 시켰으면 그만 뒀을 지도 모르죠. 요즘 애들처럼 체력훈련 같은 막 뛰는 농구를 한 것이 아니라 1대1 위주의 게임으로 재밌게 배웠어요. 이기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농구의 기술과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것들을 배웠죠. 그러니까 농구에 재미를 붙이게 된 거죠.
고집스런 정체성
유재학은 뚝심 있는 지도자다. 자신만의 전술로 상대팀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학창시절도 마찬가지였다. 농구명문 용산중에서 농구 인생을 연 그는 주변의 불합리함을 인정하지 않았다. 스스로 정체성을 찾아 기성세대에 맞서 도전했다. 중·고등학교 랭킹 1위 선수였지만, 정해진 코스가 아닌 스스로 가야 할 길을 찾아 개척했다. 그의 고집스런 행보는 결국 그가 원하는 농구를 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Q.농구 명문 용산중으로 진학을 하게 됐습니다.
A.상명초는 무조건 용산중으로 진학을 했어요. 1학년 때 운동이 너무 힘들었어요. 남산도 매일 뛰었고요. 초등학교 때 그런 농구를 하지 않다가 갑자기 하니까 무릎이 아프더라고요. 너무 아파서 농구를 안 했어요. 그대로 몇 개월을 쉬었죠. 게다가 성적도 괜찮았어요. 1학년 때 반장을 했었고, 2학년 때까지 10등 안에 들었으니까요. 그냥 공부로 가자고 생각했었죠.
Q.다시 농구부로 들어가게 된 이유가 뭐였나요?
A.역시 선생님이 집으로 계속 찾아 왔죠. 설득하려고요. 그때 다시 넘어간 이후로는 한 번도 운동을 쉰 적은 없어요. 대신 3학년 올라가면서 성적은 떨어지더라고요. 소년체전 때면 다른 학교에서 합숙을 했는데, 수업을 빠뜨리게 되면서 성적도 계속 떨어졌죠. 운동과 공부를 같이 하기는 힘들더라고요. 그래도 중간은 했던 것 같아요.
Q.어떤 과목을 가장 좋아하셨나요?
A.‘만수’라는 별명처럼 수학을 좋아하셨을 것 같은데요. 수학은 잘 못했어요. 하하. 물리도 별로였고요. 영어나 국어, 사회, 국사 같은 과목을 더 좋아했죠. 특히 영어는 중학교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재밌어서 좋아했던 것 같아요.
Q.도망까지 갔던 중학교에서 어떻게 농구에 다시 재미를 붙이신 건가요?
A.1학년인데도 기존의 선수들보다 수준이 더 높은 농구를 했었던 것 같아요. 형들이나 선생님들이 제 플레이를 보고 깜짝 놀랐으니까요. 키 큰 선수를 상대로도 문제가 없었고, 노-룩 패스 같은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으니까요. 용산중에서도 남들이 안 가르치는 것을 많이 했어요. 자연스럽게 연결해서 배워 갔던 것 같아요. 그런데서 재미를 느낀 거죠.
Q.가드로서의 재능은 타고나신 것 같아요.
A.천부적인 소질을 타고난 것 같긴 해요. 가드는 원래 타고나야 하거든요. 제가 다른 스포츠는 다 못했어요. 특히 축구도 못하고, 아무튼 발로 하는 것은 다 못했어요. 확실히 발보다는 손이 발달됐나봐요. 하하. 농구 외에는 다른 스포츠를 해본 적이 거의 없어요. 당구도 대학 때 처음 배웠는데, 두 게임 치고 재미를 못 느껴서 안 했어요. 농구를 제외하고 오래 해본 종목이 없었던 것 같아요.
Q.용산중 시절 39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웠습니다.
A.중2 때부터죠. 나가면 다 이겼어요. (전)창진이도 같이 뛰었고요. 창진이를 빼고는 그 때 멤버들이 지금 농구를 다 그만 뒀죠.
Q.그 당시 플레이 스타일은 어떠셨나요?
A.중학교 때는 올-어라운드 플레이어였죠. 정해진 포지션이 없었어요. 무조건 저한테 공이 오고 시작하는 거였으니까요. 중학교 때 키가 176cm 정도였는데, 제 키는 그때 거의 다 자란 셈이죠.
Q.2년 후배 허재와 같이 뛸 기회는 많이 없으셨나요?
A.허재의 자극제가 됐다는 얘기가 있어요. 허재는 동북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초등학교 때는 못 봤어요. 제가 중학교 졸업할 때쯤 들어왔죠. 제 동생이 허재 친구였어요. 제 동생도 농구로 용산중에 들어왔거든요. 허재를 제외하고는 그 또래들이 다 그만 뒀죠. 아무래도 허재는 1학년이다 보니까 경기를 뛰지 못했어요. 경기 끝나고 학부모들이 모여서 밥 먹으면 허재 아버지가 저를 부러워하셨죠. 매번 ‘넌 천재다’라고 하시면서요. 하하. 아마 처음에는 제가 모델이 됐을 수 있을 겁니다. 허재가 중학교 2학년에 올라갈 때 저한테 와서 인사를 한 번 하더라고요. 제가 경복고 1학년 때였죠. 그때 보니까 체격부터 몰라보게 많이 커 있더라고요.
Q.경복고 시절 5개 대회 우승을 휩쓸었습니다.
A.용산고가 아닌 경복고 진학이 생소한데요. 용산중을 나오면 당연히 용산고를 가는 거였죠. 하지만 전 싫었어요. 같은 체육관에서 같은 선생님한테 배우는 것 자체가 싫었어요. 게다가 용산고에는 8~9명의 선배들이 있었는데, 모두 잘하는 선수들이었기 때문에 제가 뛸 자리가 없었죠. 용산고에서는 베스트로 뛸 수 있으니까 걱정 말라고 했지만, 전 그냥 싫었어요. 제 삼촌이 경복고 출신이었고, 다른 학교에서 스카우트를 한다는 것 자체가 설레었죠. 양정고 김윤호도 스카우트를 하고 새로 농구를 시작하는 것 같은 신선함이 있었으니까요.
Q.경복고 진학이 쉽지만은 않았겠어요? 난관도 많았을 테고요.
A.용산중에서 승인 도장을 찍어주질 않았죠. 부모님도 저한테 ‘너 꼭 그렇게 해야겠냐?’고 설득했고요. 저도 어린 나이였지만,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불법도 아니고 제 의지대로 합법적으로 하는 일이었으니까요. 진학을 하려면 구청에서 월~토요일까지 승인을 해야 하는데, 저 때문에 특기생들이 모두 대기자로 멈춰 있었어요. 결국 용산중이 졌죠. 일요일에 개인적으로 가서 승인 도장을 찍었거든요.
Q.어렵게 진학한 경복고에서는 어땠나요?
A.새로운 농구였어요. 1학년 때부터 제가 대장이었죠. 첫 대회 나가서 준우승을 했고요. 용산고와 고1 때 결승에서 만나 지긴 했지만요. 고등학교 때 대학 선배들과 연습경기를 처음 해봤어요. 그런데 재미를 또 느끼는 거죠. 어렸을 때부터 형들하고 놀아서 그런지 몰라도, 저보다 뛰어난 사람들하고 하는 게 좋았어요.
Q.경복고에서도 플레이 스타일에서는 변화가 없었나요?
A.고등학교 때도 시작은 가드로 하는데, 결국에는 다 돌아다녀요. 포인트가드로 변한 것은 기아에 가서였으니까요. 대학까지는 그냥 공격수라고 해야 할 것 같아요. 혼자 치고 들어가서 패스하고, 슛하고…. 혼자서 휘젓고 다니는 거죠.
Q.왠지 농구와는 어울리지 않는 체형이에요. 신장에 대한 핸디캡은 없었나요?
A.고등학교 때까지 신장이 작아서 불편한 적이 없었어요. 대학 와서 조금 느끼겠더라고요. 그래도 공격하는데 불편하거나 그런 것은 없었어요. 스피드와 기술로 많이 노력을 해서 보완을 한 거죠. 그 당시 센터가 190cm 정도였으니까 178cm로 불편함을 못 느끼는 거죠. 저보다 큰 선수들이 맡아도 대신 발은 저보다 훨씬 느렸으니까요.
Q.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한 훈련이 어떤 것이었나요?
A.슈팅 훈련에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했어요. 상대를 제치는 것은 그 당시 너무 쉬웠기 때문에 슛을 넣는 게 굉장히 중요했거든요. 당시 이충희라는 선수가 나타났고, 그래서 슛을 엄청나게 연습했죠. 특별한 방법보다는 그냥 무작정 많이 던졌던 것 같아요.
Q.경복고 진학도 그랬지만, 연세대 진학 당시에도 진통이 있었습니다.
A.당시 고교랭킹 1위였는데요. 당시 경복고가 장학금을 고려대 삼양사라는 곳에서 지원을 받았어요. 그렇다보니 학교에서는 무조건 고려대로 가야 된다고 했었죠. 경복고 감독을 비롯해 동문회 계신 분들이 연세대 간다고 저를 엄청 미워하셨죠.
Q.연세대를 고집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A.어릴 때부터 장충체육관 꼭대기에서 파랑색과 빨강색이 왔다 갔다 하는데, 파랑색 유니폼이 머리에 남아 있었어요. 무조건 연세대를 가기 위해 농구를 한 것이었죠. 제 농구 스타일이 있고, 제가 잘 할 수 있는 곳에서 농구를 해야 한다고 생각을 했어요. 사실, 지원을 해주는 곳이 어딘지도 몰랐고, 그런 것을 걸림돌로 내세우니까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죠.
Q.학교측에서도 쉽게 허락을 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A.협박 아닌 협박도 있었죠. 고려대를 안 가면 앞으로 지원을 못 받는다고요. 무지하게 애를 쓰셨어요. 또 도장을 안 찍어준 거죠. 그러면 전 군대를 가겠다고 했죠. 그 당시 상무와 비슷한 해병이라고 있었어요. 군 제대 후 대학을 가겠다고 했죠. 아는 선배가 책임지고 넣어주겠다고 하기도 했고요. 나중에는 어쩔 수 없이 찍어주더라고요. 또 제가 이긴 거죠.
Q.연세대에 최병식과 강양택이 있었지만, 결국 중앙대 아성을 넘지 못했습니다.
A.제가 연세대 2학년 때 중앙대에 김유택이 들어오면서 장신 군단이 완성됐죠. 그때는 무조건 중앙대였어요. 한기범과 김유택, 2m 둘이 있는데 어떻게 이겨요. 선수들이 더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그 당시 대학 경기보다는 대학선발이나 유니버시아드 대회 같은 국제대회의 의미가 더 컸죠.
Q.대학 시절 기억에 남는 대회나 경기가 있으신가요?
A.무조건 고려대와의 경기죠. 종별이나 춘계 대회에서도 지면 운동이 힘들어지는 것도 있긴 했지만, 무조건 연고전에 대한 생각만 머릿속에 있었어요. 100일 합숙훈련이 정말 힘들었어요. 그래도 전 운 좋게 청소년대표로 1학년 때 빠지는 경우가 많았죠.
Q.가장 힘들었던 순간이 언제인가요?
A.운동이 힘들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운동 외적인 부분이 힘들었어요. 대학 1, 2학년 때가 가장 힘들었죠. 하루에 4번씩 집합을 할 때도 많았으니까요. 맞기도 많이 맞고요. 한 번은 동기들이 전부 도망간 적이 있었어요. 짜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힘들어서 나가는 애들이 많았죠. 그렇게 힘들어도 전 도망에 대한 필요성은 못 느꼈어요. 대책 없이 나가고 싶진 않았죠.
Q.사실, 고등학교 때까지 한 번도 맞지 않고, 편하게 농구를 했다고 할 수 있잖아요?
A.고등학교 때도 2학년은 없었고, 3학년만 3명이 있었죠. 그러다 대학을 오니까 너무 힘든 거죠. 제가 잘못해서 집합하는 것도 아닌데, 매일 집합을 하니까 싫었죠. 이유도 되지 않는 걸로 집합을 하니까요. 그 당시에는 그런 게 심했어요.
Q.대학 시절부터 인기몰이를 하신 건가요? 오빠부대도 항상 따라 다녔잖아요.
A.대학 때는 많지 않았어요. 제가 농구대잔치 시작 세대라서 대학 졸업하고, 실업갈 때쯤 오빠부대가 생겼죠. 그때는 농구잡지도 많아서 여학생들이 좋아하기 시작했죠. 잡지에서도 인기랭킹을 매기면 무조건 농구선수들이 상위권을 다 차지했어요. 그러면서 오빠부대가 생긴 거죠.
Q.그 당시 따라다니던 기억나는 팬들도 있으신가요?
A.기억나는 팬들 많죠. 학 천 마리를 접어 선물하는 게 유행이었는데, 집에 학이 수십만 마리 는 있었을 거예요. 편지도 정말 많았고요. 지방에서도 올라와 학교 숙소 앞에서 기다리는 팬들도 많았죠.
포인트가드 역사를 바꾸다
유재학은 한국농구를 대표하는 전형적인 포인트가드로 기억된다. 하지만 대학 때까지 그는 특별한 포지션이 없었다. 득점력과 돌파, 넓은 시야를 모두 갖춘 올 어라운드 플레이어에 가까운 전형적인 공격형 가드였다. 그를 바꾼 것은 당시 기아자동차를 이끌던 방열 감독이었다. 그의 천부적인 패스 능력을 살리기 위해 포인트가드로 전향시켰다. 어시스트 기준이 엄격하던 1980년대, 그는 포인트가드로 전향한 첫 해 무려 한 경기 21어시스트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4년이라는 짧은 실업선수 생활 동안 그는 포인트가드의 역사를 새로 썼다.
Q.연세대 졸업 후 실업팀 기아자동차로 입단했습니다.
A.사실 한국은행도 생각하고 있었어요. 장래를 봐서 은행을 생각해야 했으니까요. 현대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는데, 그 당시 기아가 생기면서 빼도 박도 못하고 기아로 가게 된 거죠.
Q.기아자동차 창단 시절부터 주장을 맡으셨어요. 그 때부터 리더십이 탁월하셨나 봐요?
A.초·중·고·대, 대표팀, 실업팀에서 제가 나이가 가장 많을 때는 항상 주장을 했어요. 선생님들이 무조건 주장은 저만 시키더라고요.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어요.
Q.주장으로서 후배들에게 어떤 스타일이었나요? 그때부터 명장으로서 자질을 보이신 것은 아닌가요?
A.지는 것을 너무 싫어해서 이기는 것에만 포커스를 맞춰서 했었어요. 게으른 후배들에게는 야단을 치고, 연습을 더 많이 시켰죠. 동기들에게도 그런 부분에 소홀하면 분명하게 얘기하는 성격이었어요.
Q.그때부터 소문난 훈련 강도가 나오기 시작한 것 아닌가요?
A.저는 훈련 양이 많은 편이 아니에요. 쓸데없이 운동하는 것을 싫어하거든요. 3시간 운동을 하더라도 노는 게 대부분이기 때문에 2시간을 하더라도 제대로 하는 것을 추구하는 거죠. 예전부터 어영부영보다 화끈하게 하는 것을 좋아했어요. 우리 선수들도 운동은 2시간을 넘긴 적이 없어요. 단지 그 시간을 강하게 훈련시키는 것뿐이죠. 그 외적인 시간은 알아서 개인훈련을 하고요. 제가 허튼 것, 설렁설렁하는 것을 못 보니까 선수들이 항상 긴장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제가 정확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그런 게 선수들한테는 피곤한 거죠.
Q.본격적인 포인트가드로의 전환은 실업팀 기아에 입단하면서부터 였습니다.
A.대학 때까지는 야전사령관이라는 것이 없었어요. 실업에 오고 성인 농구를 하면서 처음 배우고 접한 거죠. 방열 선생님의 영향도 컸죠. 그런 변화가 좋았어요. 제가 끌고 나가고 새로 느끼고 배우는 것 자체가 좋았죠. 포인트가드라는 포지션에 새로 적응하는데 어려움은 없었어요.
Q.경기당 10개 이상의 어시스트는 물론 1987년 경희대를 상대로 21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했어요.
A.그 당시 어시스트 룰 자체도 엄격했는데 말이죠. 기아 첫 해에는 한기범 같은 받아먹을 만한 선수가 없었어요. 그 해 제가 경희대를 상대로 21개의 어시스트를 했는데, 그때는 득점력이 뛰어난 선수도 없었죠. 어시스트 룰도 지금과 달라서 드리블을 한 번만 쳐도 인정이 되지 않았던 시기에요. 확실한 패스만이 어시스트로 인정됐죠. 포인트가드를 맡은 첫 해 그 기록을 세우게 됐고, 제가 넣는 것보다 다른 선수들이 넣는 것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어요.
Q.어시스트의 천재라는 말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닐텐데요. 비법 같은 것은 없었나요?
A.룰은 없어요. 포인트가드는 타고나야 하는 것 같아요. 공격을 많이 하다 보면 보이게 되는 거죠. 사실, 농구라는 것이 수학 공식처럼 돼 있긴 해요. 투-온-투 플레이를 하더라도 공식이 정해져 있죠. 대부분의 전술은 기본적으로 코트 안에서 정해져 있으니까요. 하지만 순간 판단을 할 수 있는 센스가 있어야 가드가 될 수 있어요. 그 타이밍을 놓친 다음에 알아채는 선수가 많거든요. 순간적인 상황 판단, 손기술, 유연성이 모두 갖춰져야 나올 수 있는 거죠.
Q.실업팀에 있으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가 있다면요?
A.삼성이나 현대 모두 역전 시켜서 이겼을 때가 있었는데, 아무래도 현대랑 할 때가 기억에 남아요. 경기 종료 직전 이충희가 2점슛을 넣고 제가 다시 2점슛을 넣으면서 89-89인가로 동점이었죠. 그때가 종료 6초를 남겨놓은 상황이었는데, 이충희가 다시 3점슛을 성공시킨 거죠. 남은 시간이 4~5초 정도밖에 없어서 우리도 거의 포기를 한 상태였죠. 제가 골을 넣으려고 한기범한테 볼을 주고 다시 받았어요. 하프라인에서 슛을 던졌는데, 들어간 거죠. 그렇게 연장전에 가서 이겼던 기억이 나네요. 가장 짜릿했던 경기인 것 같아요.
Q.1988-89년 농구대잔치에서 허재와 김유택 등을 따돌리고 MVP를 탔습니다.
A.실업 3년차였죠. 그때도 아마 현대와 삼성을 뒤집을 때 결정타를 날린 경기가 있을 거예요. 어시스트상은 매차마다 받았지만, MVP는 처음이었습니다. 현대와 삼성의 나이 많은 선배들을 상대로 이긴다는 것 자체의 의미가 컸죠. 대단했던 선배들이었으니까요. 그 선배들을 제치고 제가 상을 받았다는 게 더 뿌듯했고요.
Q.실업팀에 와서 득점보다는 어시스트에 주력했습니다.
A.스포트라이트는 득점을 많이 한 선수에게 집중되잖아요. 아쉬움은 안 남나요? 득점에 대한 아쉬움은 정말 없었어요. 꼭 득점을 많이 한다고 해서 그 선수가 팀을 대표한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지금 오리온스를 봐도 득점을 다른 선수가 많이 하더라도 팀의 중심은 김승현인 것처럼 공을 항상 제가 갖고 움직이니까 득점은 중요하지 않았어요.
Q,대표팀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가 있었다면요?
A.대학 4학년 때 대학선발이나 U대회는 제가 거의 주장을 맡았어요. 유고 자그레브 유니버시아드 대회였는데, 가드를 보면서 유럽 큰 선수들을 상대로 전체 득점랭킹 2위를 기록한 적이 있어요. 그때는 참 재밌었죠. 박한 감독님이 있을 때였는데, 저를 믿고 공격을 많이 시켜주셨죠. 태릉선수촌 분위기도 좋았고요.
Q.농구인생의 라이벌이 있었다면, 누구라고 생각하시나요?
A.개인적인 라이벌을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이충희는 슛을 잘하는 모델이었죠. 그 사람만의 장기가 있었으니까요. 저도 다른 선수들이 못 따라오는 장기를 갖고 있었고요. 선수가 라이벌이라기보다는 현대나 삼성이라는 팀이 라이벌이었던 시절이라 생각해요.
Q.요즘 선수들 중에 닮은꼴로 생각하는 선수가 있나요?
A.전 드리블을 많이 하거나 재간을 부리는 그런 농구를 하지 않았어요. 스피드와 패스, 슛. 이 세 가지로 농구를 한 거죠. 그런 면에서 보자면 이상민이나 김승현 스타일이 저와 비슷한 것 같네요. 그래도 요새 애들이 저보단 잘하죠. 하하.
Q.좋은 포인트가드란 어떤 선수일까요?
A.농구를 알아야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득점을 하는 선수는 눈앞에 있는 사람만 봐도 할 수 있지만, 패스는 전체를 다 봐야 할 수 있거든요. 농구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할 수 없는 게 어시스트에요. 길을 다 알고 있어야 하니까요. 그래서 패스가 더 가치가 있는 거라 생각해요.
은퇴…그리고 명장이 되다
스타플레이어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를 시샘했던 것일까. 선수나이 28세. 너무도 짧은 농구인생이었다. 고질적인 무릎 부상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그는 미련이 없었다. 1991년 은퇴와 함께 찾아온 지도자의 길. 그의 농구인생은 새로운 시작이었고, 또 다른 도전이었다. 모교 연세대에서 코치로 시작한 지도자의 길이 어느덧 18년이 흘렀다. 2009년 11월 4일. 그는 현역 감독으로서는 유일하게 프로농구 역대 통산 두 번째로 정규시즌 300승 고지에 올랐고, 46세7개월15일이라는 역대 최연소라는 금자탑을 세웠다. 천재 가드가 아닌 천재 감독으로 한국농구의 새로운 역사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Q.실업 데뷔 4년 만에 은퇴를 했습니다. 서른이 채 되지 않은 나이였는데요.
A.고질적인 무릎 부상 때문이었는데요. 당시 파벌 싸움의 희생이라는 말도 있었고요. 파벌 다툼은 말도 안 되죠. 제가 무릎 수술을 세 번 했어요. 한국에서 두 번을 했는데, 그 때 잘못된 거죠. 일본서 세 번째 수술을 했는데, 황당해하더라고요. 안 해도 될 수술을 엉뚱한 곳에 한 거죠. 한국에서도 가장 잘한다는 병원을 갔었는데 말입니다. 무릎이 너무 안 좋은 상황에서 모교인 연세대에서 코치 제안이 왔어요. 그 당시만 해도 코치는 감독에게 용돈 받는 식이었는데, 저한테 정식 계약 코치 자리를 만들어 준거죠.
Q.은퇴하긴 이른 나이라 아쉬움도 많이 남았을 것 같은데요.
A.아쉽긴 했죠. 28살에 은퇴를 했으니까요. 그래도 선수 생활을 하면서 해볼 것은 다 해봐서 마음이 아플 정도로 아쉽고 그렇지는 않았어요. 은퇴의 아쉬움보다는 가르친다는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마음이 더 컸으니까요.
Q.스타 출신 감독은 실패한다는 정설을 깨셨어요. 요즘도 선수들을 보면 답답하거나 그런 생각을 하시나요?
A.예전에는 그런 생각을 했죠. 선수들을 보면서 못한다는 생각도 많이 하고요. 머릿속으로 삭히는 수밖에 없어요. 지도자 생활을 오래 해서 이젠 그런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아요.
Q.기러기 아빠의 대표 주자가 됐어요.
A.예전에는 많이 힘들어 하셨는데, 요즘은 어떤가요? 처음엔 많이 힘들었는데, 요즘은 적응이 많이 됐어요. 이제 얼마 안 남았거든요. 딸이 2년 후 대학 입학을 하기 때문에 조금만 더 고생하면 되죠.
Q.아드님도 농구를 했잖아요. 지금은 취미로만 하고 공부를 택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A.고등학교 때 농구와 공부를 함께 했는데, 대학은 시험을 봐서 들어갔죠. 대학 입학을 앞두고 아들이 고민을 많이 했는데, 전 고민을 하지 않았어요. 대학가서도 처음에는 트라이아웃을 해보겠다고 하더니 지금은 농구를 포기한 것 같더라고요. 공부가 장난이 아니라서 두 가지를 다 하면 성공 못한다는 것을 안 거죠.
Q.모교 연세대에서 첫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적응하기 힘들지 않으셨나요?
A.처음에는 정말 힘들었어요. 아마추어는 스카우트 싸움이라서 밤새고 시간 투자하는 일이 굉장히 많았죠. 4년 조금 넘게 했는데, 지나고 생각해보면 고생을 해본 것과 안 해본 것은 분명히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Q.인천 대우증권(현 전자랜드)에서 첫 프로 지도자 생활을 했습니다.
A.그 당시에는 선수도 좋지도 않았고, 새로 시작하는 것이라 역시 힘들었죠. 명칭은 코치였지만, 창단 팀이어서 감독 역할까지 다 한 것 같아요.
Q.지도자로서 눈을 뜨게 계기가 언제였나요?
A.언제 한 번에 눈을 뜬 것은 없어요. 그냥 조금씩 발전하는 거죠. 시야도 점점 넓어지고요. 지금도 늘고 있는 것 같으니까요. 지금이라고 다 떴겠어요?
Q.선수와 지도자, 둘 중 어떤 생활이 더 힘든가요?
A.지도자가 확실히 힘들죠. 선수들은 지금이 정말 행복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저도 선수 때가 훨씬 행복했으니까요. 선수생활을 하고 있을 때 열심히 뛰어야 해요.
Q.지도자로서 롤-모델이 있었다면요?
A.지도자는 방열 선생님이죠, 저에게 새로운 것을 항상 가르쳐 주셨고, 틀린 것을 맞게 집어 주셨거든요. 제 지도력은 거의 방열 선생님의 영향을 받은 것과 다름없어요. 지금도 많이 배우고 있으니까요.
Q.감독님께 농구란 어떤 것인가요? 다시 태어나도 농구를 하시겠어요?
A.전 좋아요.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걸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천직이라고 해야 할까요? 다른 것을 하지 못해 아쉬운 부분은 있죠. 아들은 미국에서 농구도 하고 다른 것도 경험을 많이 하고 있으니까요. 농구 외에 다른 것을 해보지 못한 아쉬움은 있지만, 농구 자체는 정말 좋은 것 같습니다.
Q.이제 자타가 공인하는 명장입니다. 어떤 지도자가 좋은 지도자일까요?
A.선수를 잘 알아야 좋은 지도자라 생각합니다. 내가 가진 선수가 어느 정도의 수준이고, 어떤 것을 뽑아내야 하는지 잘 알아야 하는 거죠. 농구 뿐 아니라 그 선수의 성격까지 모든 것을 다 알아야 팀을 끌고 갈 때 문제가 없는 거라 생각해요.
영상출처 : 대한농구협회.KBL,점프볼DB
오프닝, 클로징 : 손대범 편집장
영상촬영/ 편집 : 박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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