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광란 특집-3] 3월을 빛낸 깜짝 스타들(1) 마이클 조던도 깜짝스타다?

해외농구 / 최연길 칼럼니스트 기자 / 2024-03-28 09:5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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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프볼=최연길 칼럼니스트]80년이 넘는 긴 역사를 지닌 NCAA 남자 농구 토너먼트인만큼 수많은 슈퍼스타들이 탄생되었다. 그중 3월의 광란에서 깜짝 활약을 펼치며 자신의 이름값을 높인 선수들도 많다. 그래서 기대 이상의 활약으로 자신의 진가를 발휘하고 소속팀을 높은 곳까지 이끈 선수들을 10명을 정리해보았다.


1. 마이클 조던 (1982년 노스캐롤라이나 우승)
마이클 조던이 깜짝 스타? 그렇다 조던은 기대 이상의 활약을 펼치며 자신의 이름값을 전국에 알리고 이후 시작될 에어 조던의 시대를 1982년 3월에 문을 열었다. 조던은 고등학교 때 갑자기 등장한 스타였다. 그 덕에 여러 대학으로부터 외면을 받았다. 당시 최고 명문이던 UCLA로부터는 입학 제의를 받지 못했고 노스캐롤라이나의 영원한 라이벌 듀크의 마이크 슈셉스키 감독에게도 ‘우리는 더 이상 너(조던)에게 관심이 없다’는 편지(이 편지는 노스 캐롤라이나 농구 박물관에 박제되어있다!)를 받았다. 결국 조던은 자신의 우상이던 마이클 톰슨의 모교 노스 캐롤라이나 주립의 라이벌 노스캐롤라이나에 입학했다. 입학 당시 조던은 입학 동기 버즈 피터슨보다 주목을 덜 받기도 했다. 조던의 스승 딘 스미스 감독은 조던에게 ‘주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당연한 말을 했다. 하지만 1학년부터 주전을 꿰찼다. 걸출한 선배 제임스 워디, 샘 퍼킨스에 밀려 팀 내 득점 3위였지만 13.5점, 4.4리바운드, 1.8어시스트로 기대 이상의 활약을 펼쳤다. 1982년 파이널4(4강)에서 18점 5리바운드 2어시스트를 기록하며 17점 9리바운드 3어시스트를 기록한 향후 NBA 라이벌이 되는 클라이드 드렉슬러를 상대로 판정승을 거뒀다. ‘삼각편대’ 퍼킨스-조던-워디의 활약으로 휴스턴을 68-63으로 꺾은 노스캐롤라이나의 결승 상대는 걸출한 1학년 센터 패트릭 유잉과 베터랑 가드 슬리피 플로이드가 버티는 조지타운이었다. 결승 당일 조던은 자서전에서 낮잠을 잘 때 결승골을 넣는 꿈을 꿨다고 했다.

종료 32초를 남기고 61-62로 뒤진 상황, 스미스 감독은 작전 시간을 불렀다. 뒤지고 있었지만 스미스 감독은 선수들에게 자신감이 넘치는 확신이 가득 찬 얼굴로 “올해 내내 나는 우리가 전미 최고 팀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는 챔피언십을 차지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좋아 제군들, 우리는 현재 좋은 분위기에 있다. 우리가 이 경기 승리를 결정할 것이다. 나는 상대가 프레스를 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존(지역방어)을 쓸 것이다. 먼저 워디에게 롭패스를 봐라. 롭패스를 잡으면 위크사이드로 돌파해라. 롭패스가 여의치 않으면 위크사이드로 가서 리바운드 위치를 점령하라. 퍼킨스 너는 자유투라인으로 가서 가운데 리바운드 위치를 차지하라. 우리 슛시도가 실패해도 우리가 리바운드를 따낼 것이다. 혹시 리바운드를 잡지 못하면 곧바로 파울해서 자유투를 줘라”라고 작전을 이어갔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마이클(조던), 너에게 공이 오면 점프슛을 넣어라”라며 조던에게 지시했다. 이때 스미스는 ‘던저라’가 아닌 ‘넣어라(Knock it in)’라고 명확히 말했다. 그리고 종료 15초 전 상대의 1-3-1 지역방어의 약점인 오른쪽 코너에서 조던은 점프샷을 집어넣고 승부를 갈랐다. 이후 조던은 우리가 아는 마이클 조던이 되었다. 조던 역시 이 샷이 자신의 인생을 바꿨다고 말했다.
 

 

2. 드웨인 웨이드 (2003년 마켓 파이널4)
드웨인 웨이드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유망주였지만 명문 대학교로부터 외면을 받았다. 자신의 고향인 시카고의 드폴, 일리노이도 웨이드를 원하지 않았다. 이유는 하나 학업이었다. 웨이드는 NCAA 규정에 합당한 ACT(美대입수능시험) 성적이 미달이었고 이를 달성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많은 대학들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그럼에도 위스컨신州의 마켓의 탐 크린 감독은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1학년을 학업에 전념하며 2학년 때 출전 허가를 받은 웨이드는 3학년 때인 2002-2003년 경기당 21.5점 6.3리바운드 4.4어시스트 2.2스틸로 맹활약하며 퍼스트팀 올아메리칸에 선정되는 기염을 토했다.

 

웨이드의 활약에도 마켓에는 의문부호가 달렸다. 컨퍼런스 USA 우승을 루이빌에게 내준 마켓은 중부 지역 3번 시드를 받았지만 아무도 마켓이 파이널4에 오르리라고 예상하지 않았다. 같은 지역에 키스 보건스, 켈리나 아주부키, 척 헤이즈 등 향후 NBA 선수들이 즐비한 1번 시드 켄터키와 브랜딘 나이트 등이 버티는 2번 시드 피츠버그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1라운드에서 약체 홀리스 크로스 대학을 상대로 15점으로 몸풀기에 성공한 웨이드는 2라운드 미주리와의 경기에서 24점 8리바운드 7어시스트, 피츠버그 와의 경기에서 22점 3리바운드 4어시스트 3스틸을 기록했다. 중서부 지역 결승에서 강호 켄터키와의 경기에서는 무려 29점 11리바운드 11어시스트 4블록슛으로 트리플 더블을 기록하며 1977년 이후 26년 만에 마켓을 파이널4로 이끌었다. 파이널4에서 웨이드는 19점 6리바운드로 분전했지만 닉 콜리슨, 커크 하인릭, 웨인 시미언 등 향후 NBA 스타 5명이 버틴 캔자스에게 61-94로 완패했다. 토너먼트에서 주가를 상종가로 올린 웨이드는 당초 예상을 깨고 2003년 드래프트에서 전체 5번으로 마이애미 히트에 입단했다. 그리고 NBA를 주름잡으며 마이애미를 3번 우승시키고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3. 퍼비스 엘리슨 (1986년 루이빌 우승)
NCAA 농구는 고학년들(3, 4학년)의 리그다. 1972년까지는 1학년들은 규정상 출전하지도 못했다. 1학년이 맹활약하며 NCAA 우승을 차지하는 경우는 없었다. 단 1986년 절대 긴장하지 않는 남자 ‘네버 너버스 퍼비스(Never Nervous Pervis)’ 엘리슨(206cm, 센터)이 등장하기 전까지 말이다. 엘리슨 이후 카멜로 앤서니, 앤서니 데이비스, 타이어스 존스 등이 1학년으로 MOP(Most Outstanding Player)에 올랐지만 엘리슨의 당시 활약은 센세이션이었다. 조지아州 사바나 출신인 엘리슨은 당초 조지아 공대에 진학을 하려 했지만 명장 대니 크럼의 제의를 받아들여 명문 루이빌로 진로를 바꿨다. 1학년 때부터 모든 경기에 주전으로 나선 엘리슨은 경기당 13.1점 8.2리바운드 2.4블록슛을 기록했다. 

 

메트로 컨퍼런스 우승을 차지한 루이빌은 1986년 NCAA 토너먼트에서 승승장구하며 결승전에 올랐다. 결승 상대는 듀크였다. 듀크는 조니 도킨스, 타미 어마커, 제이 빌라스, 대니 페리 등이 버티는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경기 초반 듀크 대학의 강력한 수비에 밀리며 10-17까지 뒤졌던 루이빌은 신입생 엘리슨의 꾸준한 활약으로 추격의 고삐를 놓지 않고 전반을 34-37로 마쳤다. 경기 내내 듀크에 밀리던 루이빌은 엘리슨의 골밑 득점과 자유투로 경기 종료 48초를 남기고 70-65로 달아나며 승기를 굳혔다. 당시 전문가들은 루이빌의 4학년 듀오 밀트 외그너와 빌리 탐슨에게 주목했지만 엘리슨은 이날 25점 11리바운드 2블록슛을 기록하며 MOP를 차지했다. 1학년이 MOP를 차지한 것은 1944년 유타의 아니 페린에 이어 처음이었다. 1989년 NBA 드래프트 전체 1번으로 새크라멘토 킹스에 뽑힌 엘리슨은 양쪽 무릎 부상 등 수많은 부상으로 동료 대니 에인지로부터 ‘아웃 오브 서비스(Out of Servis)’ 엘리슨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등 결장이 잦았다. 워싱턴 불리츠로 트레이드된 이후 1991-92시즌 경기당 20점 11.2리바운드 2.7블락슛을 기록하며 MIP도 수상했지만 수많은 부상이 그를 괴롭히며 역사상 최악의 1번 픽이라는 오명을 듣기도 했다.

4. 레니 로젠블루스 (1957년 노스캐롤라이나 우승)
농구 역사상 가장 위협적이고 압도적인 선수를 단 한 명만 고르라면 모두 윌트 체임벌린을 떠올릴 것이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압도적인 체격조건과 운동능력을 앞세워 NBA 선수들과 대결에서 압도했던 체임벌린은 대학 시절에도 괴물이었다. 그런 괴물의 앞을 가로막은 선수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레니 로젠블루스(196cm, 포워드)다. 아마 대부분 농구팬들은 로젠블루스라는 이름을 처음 들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대학 농구에서는 전설적인 선수다. 1956-1957시즌 경기당 28점 8.8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컨센서스 올아메리칸 퍼스트팀에 뽑힌 로젠블러스는 미시건 주립과의 파이널4에서 31점 3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승리를 이끌었다. 

 

결승 상대는 2학년이 되며 대학무대를 점령한 괴물 윌트 체임벌린이었다. 경기당 29.6점 18.9리바운드로 말 그대로 압도적인 존재였다. 노스캐롤라이나의 명장 프랭크 맥과이어는 체임벌린을 정상적으로는 막을 수 없다 판단했다. 맥과이어 감독은 경기 시작부터 체임벌린의 팁오프 상대로 신장이 가장 적은 선수를 붙이는 등 신경전을 펼쳤다. 경기 내내 체임벌린에게 트리플팀을 가하고 템포를 늦추는 경기를 펼친 노스캐롤라이나는 전반을 29-22로 앞서는 등 경기 내내 캔자스 대학에 근소한 우위를 점했다. 하지만 경기 막판 실수로 46-46, 동점을 허용했고 경기는 연장전에 돌입했다. 연장전 역시 혈투였고 느린 템포 경기였다. 1차 연장에서 2-2, 2차 연장에서는 두 팀 다 무득점이었다. 하지만 승리의 여신은 노스캐롤라이나의 편이었다. 노스캐롤라이나는 3차 연장 종료 직전 조 퀵의 자유투로 54-53로 신승하며 첫 번째 NCAA 타이틀을 차지했다. 이날 체임벌린은 23점 14리바운드로 분전하며 MOP에 뽑혔다. 이에 맞선 로젠블루스는 20점 5리바운드를 기록했고 MOP보다 중요한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5. 보 킴블 (1990년 로욜라 메리마운트, 엘리트8)
보 킴블과 행크 게더스는 모두 필라델피아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같이 농구를 했다. 필라델피아의 도빈스 테크니컬 고등학교를 나란히 마친 킴블과 게더스는 세인트 조셉스 같은 필라델피아 지역 대학에서도 입학 제의를 받았지만 로스엔젤리스에 위치한 남가주대(USC)로 진로를 정했다. 두 선수는 1학년 때 준수한 활약을 펼쳤지만 감독이 해임되며 USC를 떠나기로 마음 먹었다. 그들이 정한 새로운 둥지는 1980년 매직 존슨, 카림 압둘자바를 앞세워 NBA 우승을 이끌었던 공격 농구의 대가 폴 웨스트헤드가 부임한 로욜라 메리마운트(이하 LMU였다. 폴 웨스트헤드 감독은 2000년대 NBA 피닉스 선스의 SSOS(Seven Seconds or Less)보다 파격적인 첫 번째 기회에 던지는 공격적인 전술을 썼다. 이런 전술은 기동력과 득점력을 겸비한 킴블과 게더스에게 날개를 달아주었다. 전학 규정에 따라 1년을 쉰 킴블과 게더스는 각각 1987-1988시즌 22.2점 22.5득점을 올렸고 LMU는 경기당 무려 110.2점으로 NCAA 디비전 I 득점 1위를 기록했다. 다음 시즌 게더스는 32.7점 13.7리바운드로 득점왕과 리바운드왕에 올랐다. NCAA 역사상 득점왕과 리바운드왕을 차지한 것은 재비어 맥대니얼(84-85시즌 위치타 주립대), 커트 토마스(94-95시즌 텍사스 크리스천) 등 단 3명밖에 없다. 1989-90시즌 득점왕은 킴블이었다. 킴블은 경기당 35.3점 7.7리바운드 2.9스틸 3점슛 성공률 46%, 야투성공률 52.9%, 자유투 성공률 86.2%의 고감도 슈팅력을 앞세워 득점왕에 올랐다. 게더스 역시 경기당 29점 10.8리바운드를 올리며 두 선수는 NBA 지명이 유력했다. 두 선수를 앞세운 LMU는 경기당 122.4점으로 절대 깨질 것 같지 않은 NCAA 디비전 I 득점 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정규시즌 막판 게더스가 심장 이상으로 코트에 쓰러졌고 웨스트 코스트 컨퍼런스(WCC) 토너먼트 도중 사망하며 LMU는 위기에 빠졌다. WCC 토너먼트는 즉시 중단되었고 WCC 나머지 대학의 감독들의 양보로 정규리그 1위였던 LMU는 게더스 없이 빅댄스에 나갔다. 게더스가 없는 LMU는 서부 지역 11번 시드로 낮은 평가를 받았고 아무도 LMU를 주목하지 않았다. 하지만 1라운드에서 6번 시드 뉴멕시코에게 111-92로 승리한 LMU는 2라운드에서는 3번 시드이자 디펜딩 챔피언 미시건에게 NCAA 토너먼트 한 경기 최다 득점 기록인 149-115로 승리하며 신데렐라에 등극했다. 16강에서도 앨러배마에게 62-60으로 승리하며 서부 지역 결승에 오른 LMU는 당시 우승팀이자 래리 존슨, 스테이시 오그먼, 그렉 앤서니 등이 버틴 UNLV에게 101-131로 패하며 이변의 행진을 마감했다. 당시 킴블은 토너먼트 4경기에서 평균 35.8점(40득점 이상 경기 2번) 10.5리바운드 2.3어시스트 3스틸 3점슛 성공률 45.5%라는 놀라운 기록을 남겼다. 게더스의 절친이었던 킴블은 토너먼트 경기 동안 항상 첫 번째 자유투를 왼손으로 던졌다. 이는 자유투가 약했던 게더스가 자유투를 왼손으로 던진 것을 따라하며 추모하기 위한 것으로 두 선수는 모두 오른손잡이였다. 이런 활약으로 킴블은 1990년 NBA 드래프트 전체 8번으로 L.A. 클리퍼스에 지명받았지만 사이즈(193cm)의 한계로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사진캡쳐=노스캐롤라이나 체육부 홈페이지, 마켓대 농구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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